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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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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22) 조각가 김영섭 창원대 교수

영원한 테마 ‘사람’… 오늘도 새로운 실험

  • 기사입력 : 2011-03-11 1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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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섭 교수가 작업장에서 작품 그라인딩 작업을 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23살에 조각한 ‘피에타’라는 작품을 통해 예술가로서 첫 번째 명성을 얻었다. 피라미드 구조로 예수와 마리아를 표현한 작품인데, 상념에 잠긴 듯한 마리아의 얼굴과 구겨진 옷자락, 죽어서 늘어진 예수의 시신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깎았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성모마리아의 얼굴에는 그리스 조각의 사실적 표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지만 정통적인 사실주의에 입각한 작품세계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현대조각의 매력이다. 작품의 소재와 표현된 형태도 그러하고 재료에서도 현대조각은 현격한 변화를 추구한다.

    대리석, 청동은 물론 나무, 플라스틱, 유리, 흙에다 창의적 조각을 만들기 위해 오브제를 과감히 도입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조각의 제2세대로, 다양한 재료와 색다른 오브제 작업을 많이 전시해 국내 미술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창원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김영섭(59) 교수.

    후학을 양성하는 학자로서 바쁜 일상속에서도 현대 조각의 끝없는 변화라는 작업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김영섭 교수를 만나기 위해 창녕 남지읍 성사리에 있는 작업장을 찾았다.


    ‘회화’를 접고 선택한 ‘조각’

    김 교수는 처음부터 조각을 하지 않았다. 고교 때까지 그림에 매몰돼 열심히 그렸고, 많은 대회에서 입상했다. 하지만 고교 때 많은 사물과 깊어지는 생각에 대해 따지기 시작하면서 그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데생력은 뛰어난 데도 자신이 그리는 회화가 현실과 지향점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홍익대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조각으로 바꿔 버렸다.

    대학을 다닐 때는 우리나라 조각 1세대인 홍익대 김정숙 교수 집에서 3년간 기거하면서 조수역할을 마다하지 않았고, 홍익대 대학원을 다닐 때도 군상과 동상 작업을 많이 했던 조각가 조성무 선생과 함께 3년간 수없이 작업하면서 사실적 조각에 대해 터득했다.

    그러던 김 교수는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서울의 한 도자기 수출회사에 잠시 몸담아 조각이 들어가는 도자기 제품의 디자인을 책임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도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아 지인들이 강력 추천한 마산의 한 마네킹 제작회사에 들어가 1년 반 동안 FRP 재료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FRP 마네킹 제작회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김 교수의 석사 논문이 FRP와 관련돼 있고 국내에서 인체 모델링을 사실적으로 잘한다는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입사로 인해 일본의 하청으로 마네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회사의 독자적 기술로 마네킹을 만들어 수출하려던 CEO에게 희망을 전해줬지만 당시 근로환경과 연구개발 여건이 극도로 미비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김 교수는 지난 1983년부터 5년간 경남대학교와 창원대학교 미술학과 강의를 시작으로 강사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오랜 기간 강사 생활은 김 교수를 경제적 궁핍으로 내몰고 있었다.

    김 교수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강사 생활이었지만 후학을 기른다는 생각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며 돈보다 인재양성을 우선해 왔다는 소신을 밝혔다.

    강사 시절에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던 김 교수는 30대 초반 당시 도내 회화와 도자기파트 작가 10명이 만든 ‘워커스전’에 참가했으며, 83년 권달수 김청정 김광우 이일호 교수 등과 함께 부산경남현대조각 10인전에도 참가해 조각 불모지 경남부산에 조각을 알리기 시작했다.



    목물형상에 숨어 있는 생명의 젖줄

    김 교수는 ‘조각에는 속임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회화는 일루전 요소가 많지만 조각은 실제 시·공간이 존재해야 하고, 만질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어린 시절 회화에 집착한 경험이 조각을 하면서 입체적 사고가 들지 않고 평면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고 자신을 돌아봤다. 조각작품 아이디어를 만들 때 앞에서만 보는 평면적, 회화적 배열구도를 조심해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평면적 배열구도를 경계하고 있다는 김 교수는 지난 1987년 마산 진화랑과, 서울 바탕골미술관에서 선보인 첫 개인전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나무에다 오브제를 과감히 차용해 죽어있는 자연나무를 조각작품으로 살려냈기 때문이다. 그때 김 교수는 ‘목물형상에 숨어 있는 생명의 젖줄’이라는 평을 받았다.

    김 교수의 작품 초기에는 이렇듯 자연이 만들어 놓은 형상의 나무를 많이 사용했다. 전통적 방식의 조각은 사람이 결국 만드는 것이지만 자연이 만들어 놓은 형상을 최대한 활용해, 그 속에 숨어 있는 생명력을 끄집어내는 의도화의 작업이 주류를 이뤘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재료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조각가 각자의 마음이지만,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자연과 인간을 대비해온 김 교수의 작업은 당시 미술계 트렌드를 선도할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는 자신이 젊은 시절 대다수 작가들의 주제가 생명과 환경이었다고 기억하면서 같은 주제로 연출하더라도 연출가의 능력에 따라 작품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좋은 작품이 되려면 작품속에 힘과 생명력이 숨어 있어야 하고, 작품의 구성요소를 갖추면 독특한 작품세계가 생겨 섬뜩한 작품,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는데, 그 생명력은 그 같은 연출의 결과로서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교수 작업세계의 철학적 영향은 형상을 살리기 위한 조물주의 자연 창조원리와 괘를 같이한다. 동형(同形)과 동질(同質)의 베이스를 깔고 나무에 뼈를 만들고 오브제를 사용해 생명력이 흐르도록 했는데, 작품 안에는 피도 흐르고 신경도 숨어 있다.

    접시에 담아낸 ‘영원한 테마, 사람’

    피카소는 일찍이 “미(美)라는 것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김 교수는 지난 2006년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마련한 제6회 전시회에 희한한 재료를 사용해 만든 작품을 공개했다.

    접시의 재발견.

    음식을 담을 때 사용하는 접시를 추론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접시를 사용해 작품에 차용하면 좋겠다는 단순한 발견에서 출발했다. 작가에게 우연성은 필연성이 되듯이, 평소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재료와 아이템이 눈에서 발견되고 그렇지 못하면 사물은 흘러가 버린다고 김 교수는 밝힌다.

    김 교수의 접시 안에는 사람이 등장하고, 뼈가 나오고, 지퍼가 달려 있다. 모든 것이 ‘인간과 생명’으로 조합된 시리즈 형태이다.

    접시를 오브제로 차용한 김 교수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영원한 테마, 사람’을 작품에 풀어내기 위해 자신이 발견한 재료를 바탕으로 실험과 연구와 적용을 통해 형상으로 담아내고 있다.

    접시작품을 처음 세상에 공개했을때 이를 본 관객들은 “참 재미있는 발상이다”고 입을 모았다. 접시재료가 새로웠다는 반향이었는데, 원 형태의 접시는 추상성과 개념성을 담고 있다. 현대미술이 추상에서 출발해 모든 사물을 단순화하는 작업에 열중하듯, 모든 형상의 원초적 획인 원을 그 접시 오브제가 제대로 비춰준다는 것이다.

    화장실 변기를 현대미술에 적용한 마르셀 뒤샹이나, 구닥다리 TV를 사용해 영상작품을 만든 백남준이나, 음식을 담는 접시를 오브제로 사용해 그 오브제의 생명력으로 인간의 형상과 생명을 담아내는 김 교수의 작업은 그래서 맥이 통한다.

    김 교수는 “좋은 재료를 발견하면 작품을 표현하기 쉬워지는데, 여기서 무리하게 기교를 부리면 공예가 된다”고 경계했다.

    김 교수는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큰물에서 놀 것”을 주문하면서 “서울에 가고, 외국에도 가서 더 많이 공부하라”고 독려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술작업은 소명의식 없이는 안 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김 교수는 “돈을 벌려면 다른 업종을 선택해야 하며, 작가는 작업에 욕심을 갖고 크게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김 교수가 작가로서 더 큰 욕심을 부리기 위해 2년 전 작업실을 창녕으로 옮겼다. 방학 때와 강의가 없는 날이면 늘 작업실에서 뚝딱 뚝딱거린다.

    작가의 의식을 강조하는 김 교수, 작가로서 아직 미완이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김 교수, 교수라는 직분이 좋은 작가를 만들기 위한 엑스트라라고 규정하는 김 교수, 새로운 작업장에서 더 큰 실험을 펼치고 있는 김 교수의 또 다른 작업이 궁금해진다.


    김영섭 교수가 자신의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 김영섭 교수는= 홍익대 미술대 조소과·동 대학원졸/개인전 6회/미야자키국제현대조각공항전/창원대-나가사키대 교수미전/IMPACT전(후쿠오카)/갤러리NAW오픈기념 한일교류전(오사카)/아세아 4개국 교수전/제3회 동서미술상/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역)/아시아미술제대회장(역)/도립미술관운영위원장(역)/창원대 예술대 미술학과 교수

    글=조윤제기자 cho@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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