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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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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다슬기의 봄- 정희숙(동화작가)

  • 기사입력 : 2011-03-2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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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방에 매화 향기 흩날린다. 목련꽃 봉오리도 잔뜩 부풀었다. 또 봄이 왔다는 게 신기하다. 지난 겨울의 추위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예전처럼 삼한사온이 계속될 것이라던 예보는 빗나가고 영하의 날씨가 이어졌다. 첫 추위 때는 겨울 맛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추위가 반가웠다. 문고리에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던 어린 시절의 추위가 생각났다.

    그런데 ‘구제역’이란 난데없는 복병이 닥쳤다. 조용하던 시골마을의 평화가 깨졌다. 자식 같은 가축을 생매장시키고 애통해 하는 축산농가의 애절한 사연이 마음을 울렸다. 구제역 때문에 설날 고향 가는 길도 막혔다. 계속되는 영하의 기온으로 소독약이 뿌리는 동시에 얼어버려서 효과가 떨어진다고 했다. 그제야 맹위를 떨치던 동장군이 하루빨리 물러가기를 바라게 되었다.

    세 마리의 다슬기도 봄을 기다리게 했다. 작년 가을 계곡에서 같이 갔던 지인이 어항에 키우려고 잡았는데 내 가방에 담아온 게 인연이 되었다.

    참 막막했다. 청정계곡에서 살던 다슬기가 도심 속 아파트에 갇히다니. 얼마나 고역일까. 내 살던 곳 떠나 이역만리 낯선 나라의 열악한 환경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안쓰러웠다. 당장 뭘 먹여야 할 텐데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마땅한 먹잇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온갖 만류를 뿌리치고 아이들이 40여 일 된 강아지를 사왔을 때보다 더 그랬다. 급격한 환경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 자칫 내 손으로 다슬기의 주검을 처리해야 될 수도 있겠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죽음과 마주한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계곡으로 데려다 주기엔 너무 바쁘거나 게을렀다. 주인에게 떠넘기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고민 끝에 주인에게 물었더니 밥알 몇 개만 넣어주란다. 맙소사! 밥을 먹는 다슬기라? 믿어지지 않았다. 생전 처음 대하는 남의 나라 음식 앞에서 난감해 하는 처지와 같으리라.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거니와 손쉬운 일이기도 해서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밥알은 이내 풀어졌다. 다슬기가 먹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물만 쉬 흐려졌다. 그래도 새로운 밥알을 넣어주고 물을 갈아주기를 되풀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뿐이었으니까.

    설사 밥을 먹는다 해도 영양 불균형으로 죽을지 모른다. 늘 조마조마했다. 꼭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시금치와 마른 멸치를 먹여 보란다. 뜻밖이었지만 한줄기 볕뉘를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그러나 멸치 때문에 물만 빨리 흐려졌다. 아무리 살펴봐도 두 가지 다 먹은 표시가 나지 않았다. 녀석들이 굶어 죽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죽기 전에 데려다주어야지.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겨울이 닥쳤다. 갑작스레 계곡의 찬물을 만나도 충격을 받을 것이다. 방생을 봄으로 미루었다. 이따금 알아들을 것이라고 믿으며 ‘희망’의 메시지를 건넸다.

    “힘들겠지만 잘 견뎌 줘. 봄이 오면 꼭 고향으로 데려다 줄게.”

    때문인지 다슬기는 끈질기게 생을 이어 왔다. 데구르르 죽은 듯 꼼짝 않아 나를 놀래킨 적도 많지만. 이제 봄이 왔으니 빨리 데려다 줘야겠다. 다슬기가 살아남은 것은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열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원전사고까지 겹쳤다.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다. 곳곳에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절망은 고통을 곱으로 부풀린다. 내게도 그런 일이 닥쳤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까지 당연하거나 부족하게 느꼈던 행복감이 넘치도록 고맙다.

    ‘희망만이 살길’이라지 않은가. 일본에 희망을 전해야 할 때다. 나라에서 구조대를 보낸 데 이어 한류스타를 시작으로 각계각층에서 온정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따뜻한 마음이 피워낸 사랑의 꽃이다. 돌이켜보면 괘씸한 일도 많지만 밉다고 물에 빠진 사람을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쌓인 앙금 제쳐두고 돕고 볼 일이다. 그들에게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정을 보낼 수 있다면 좋으리.

    정희숙(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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