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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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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23) 연출가 이종일씨

거창 산골마을서 오기로 도전한 30년 연극인생

  • 기사입력 : 2011-04-0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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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출가 이종일씨가 배우들에게 무대 배치와 동선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종일씨가 배우에게 등장할 때 주의사항을 이야기하고 있다.
     

    귀를 다 덮은 희끗희끗한 머리,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 무대 위에서 뒷짐 지고 뭔가에 몰입한 그의 모습은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인구 7만의 소도시 거창을 국제적인 연극무대로 만든 주인공. 거창국제연극제 집행위원장 겸 예술감독이자 극단 ‘입체’의 대표인 연출가 이종일(58)씨를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수승대 사무국에서 만나 그의 연극사랑과 작품세계를 들었다.

    연극창작과 예술축제, 문화예술교육사업 분야에 30여 년을 종사한 이 위원장은 경남 연극계의 대부이자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지난 2월 경남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직을 마치고, 경남연극제 출품작인 ‘눈바라기’를 다듬고 있었다.

    ▲극단 ‘입체’ 창단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교회연극을 접하면서다. 연극 맛을 본 그는 대학에서 극예술연구회를 만드는 등 연극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한다. 1980년 거창 대성중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한 그는 1983년 극단 ‘입체’를 창단한다. 시골 학생들에게 연극이 뭔지를 보여 주자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발을 들인 그는 결국 안정적인 교사생활도 버리고 연극인생을 걷게 된다.



    ▲나의 작품세계

    “나이가 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시선도 달라집니다. 제 작품경향도 조금씩 변화된 것 같습니다.” 이종일의 작품세계는 대략 10년 주기로 변화된 양상을 보인다. 80년대는 주로 한국적 양식을 탐색한다. ‘태’ ‘징소리’ ‘밀항선’ ‘분지의 피’ 등이 이때 작품이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집단과 개체의 부조화와 부조리를 탐구한다. ‘칠산리’ ‘님의 침묵’ ‘쾌지나 칭칭나네’ ‘사의 찬미’ 등이 그 시대 작품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자연의 절대적 질서와 인간의 상대적 질서가 교감하면서 인간실존의 가치를 다루고 있다. 대표작으로 ‘초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산유화’ ‘초승에서 그믐까지’ ‘바라나시’ ‘해피! 오 해피!’ 등이다.


    ▲기억에 남는 작품

    “직접 희곡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 애정이 더 가고, 기억에 남습니다. ‘밀항선’ ‘분지의 피’ ‘산유화’ 등이죠.” ‘밀항선’은 다른 종족끼리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다 좌절한다는 내용. 월남전으로 흘러들어온 꽁까이(베트남 처녀)와 한국전쟁 때 태어난 혼혈아의 사랑을 그린 것으로 비극적 종말을 다룬 87년 작품이다. ‘분지의 피’는 거창양민학살을 소재로 한 것. 89년 작품으로 군인들의 비행을 얘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실제 제작에도 제약이 따랐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파생된 종말적 파괴가 인간을 재물화했다는 내용이다. 인간의 손으로 뿌려진 극악한 독소는 인간의 가슴으로 빨아들여야 한다는 보편적 진리를 내세워 무고하게 희생된 양민들의 혼을 하늘로 보내고 싶었단다.

    ‘산유화’는 징을 만드는 사람인 ‘대정이’를 다룬 2003년 작품. 산유화는 허상과 다름없는 영상매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에게 징 만드는 장인의 집념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실체와 존재란 이런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극을 쓰진 않았지만 ‘태’ ‘물도리동’ ‘해피! 오! 해피!’도 기억에 남습니다.” ‘해피! 오! 해피!’는 인간의 행복을 무소유 정신에서 찾는다는 다소 불교적 정신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가난의 가치를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디오게네스’의 사상을 현대 물신주의에 충돌시켜 본 블랙코미디물. 연출가는 신성하고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다. 절대적 진실을 상실하지 않는 인간구원의 근원적 단서를 제공한다.

    “‘산유화’와 ‘해피! 오! 해피!’는 프랑스 아비뇽 공연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종일씨 연출 작품

    이종일씨 연출 작품

    ▲거창국제연극제

    이종일을 떼놓고는 거창국제연극제를 얘기할 수 없다. 지금의 연극제로 명성을 쌓기까지 그는 청춘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9년 ‘10월 연극제’가 그 시작으로, 98년부터 수승대 관광지 야외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수승대라는 천혜의 자연공간 속에 생명력 넘치는 연극적 상상력을 결합한 것이다. 700석 규모의 돌담극장, 서원을 활용한 거북극장, 900석 규모의 수승대 축제극장 등으로 시설 인프라를 갖췄다. 올해로 23년째로, 지난해 국내외 공연단체 45개팀이 참가했고, 관객도 15만명이 찾았다. 지역경제 파급효과가 188억원에 달한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지난해부터 사계절 연극축제로 또 다른 변신을 꾀하고 있다. 5월 실버연극제, 8월 국제연극제, 10월 전국대학연극제, 12월 겨울연극제까지 거창은 연극의 메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서울 중심의 문화지도를 지역과 어느 정도 수평화시켰다고 자부합니다. 또한 거창의 암울한 역사가 연극제로 인해 색깔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크고 잘 만들어진 대도시 공연장도 중요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거창의 연극무대도 많은 관객들이 좋아한다며 그간의 보람을 얘기한다.

    앞으로 수승대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에서 동부(가조·가북 온천), 남부(신원 양민학살지), 북부(고제 저수지) 지역으로 넓혀 그 지역 성격에 맞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후회는 없다

    “젊었을 때는 서울로 가서 승부를 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오기로 산골에서 버텼습니다. 연극 인생 30년 후회는 없습니다.” 그는 본래 부산 출신이다. 마산에서 대학생활을 했고, 거창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세속의 표현으로 하자면 출세를 위해 시골에서 서울로 간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연극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켜 보겠다는 연극운동가적 기질, 중앙집중 중심의 문화구도를 허물겠다는 도전정신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왔습니다.” 그는 극단 입체를 통해 국내 공연 200회를 넘겼고,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벌과 파리가을축제 등 해외공연도 14차례나 다녀왔다.

    “휴머니티가 살아있는 작품으로 많은 관객과 만나고 싶습니다.” 포부를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그의 열정과 철학을 담은 작품이 우리 삶을 좀 더 행복한 곳으로 이끌 것이다.

    ◆ 연출가 이종일씨= 경남대 영어교육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일본대 대학원 무대예술과 졸업. 경남연극협회장, 경남예총회장 역임, 경남연극제 연출상 10회, 경남연극제 희곡상 4회, 경남연극제 대상 7회, 폴란드 클래쉬연극제 최우수그랑프리상, 청주세계연극축제 대상, 한국문화예술단체 예술대상, 경남도문화상, 문광부장관상 수상. 현재 극단 입체 대표 겸 상임예술감독, (사)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장, 거창국제연극제 집행위원장 겸 예술감독, 경남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장, (사)경남예술교육경영센터장을 맡고 있다.

    글=이학수기자·사진=성민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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