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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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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초속 5센티미터- 김남호(시인)

  • 기사입력 : 2011-04-1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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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속 5센티미터’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만들어 2007년에 개봉한 일본 만화영화다. 스토리야 특별히 얘기할 게 없다. 한 문장으로 뭉뚱그리면, 초등학생 시절 만났던 첫사랑을 어른이 되어서도 못 잊고 그때의 추억에 주박(呪縛)당한 채 살아가는 ‘토노 타카키’라는 주인공 남자의 순애보를 감동적인 화폭으로 담아낸 순정만화영화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렇듯이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 것은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이나 반전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그림이다. 특히 거대한 점묘화처럼 허공을 가득 채우며 흩날리는 벚꽃잎은 줄거리의 흐름을 떠나 그림 자체만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초속 5센티미터란, 벚꽃이 질 때 꽃잎의 속도란다.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라니! 속도와 효율성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의 한복판으로 가뭇없이 떨어져 내리는 이 속도는 얼마나 통쾌한 풍자이며 근사한 상징인가.

    지난 주말 내내 벚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는 섬진강을 따라가는 19번 국도를 온통 마비시켰다. 꽃잎의 속도가 그러했고, 그 아래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차량들의 속도가 그러했고, 태양을 피해 반대쪽으로 살금살금 옮겨가는 꽃그늘의 속도가 그러했다. 이 밭고랑에서 저 밭고랑으로 넘어가는 아지랑이의 속도도, 섬진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바람의 속도도 아마 초속 5센티미터 근방이었을 게다. 사람들은 빠른 듯하면서도 한없이 느리고, 느린 듯하면서도 한없이 빠른 이 몽환적인 속도를 온몸으로 느끼며 봄날 하루를 전생의 어느 한때처럼 소요(逍遙)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나들이는 원점으로의 회귀를 전제로 한 한시적 일탈일 뿐, 나들이의 끝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암담한 현실이 9시 뉴스처럼 켜진다. 자고 나면 치솟는 전세나 물가 소식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니다. 그래서 새삼 놀라지도 않는다. 충격을 줄 수 없는 건 뉴스가 아니라 일상이다. 뉴스란 일상화된 충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곳에 있기 마련이다.

    연일 안타깝고 답답한 뉴스로 숨 막힌다. 올봄 신학기 들어 벌써 몇 명의 꽃다운 대학생들이 목숨을 버렸는가. 무엇이 저들의 꿈과 목숨을 앗아갔는가.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을 어지럽게 지나간다. 천하의 수재와 영재들이 모였다는 어느 대학은 아예 초상집 분위기다. 징벌적 등록금제! 하루하루가 버거운 소시민들의 귀에는 요령부득한 소리다. 등록금이 학생이나 부모에게 ‘징벌적’이지 않은 착한 대학도 있었던가. 지난 겨울의 피비린내 나는 구제역은 우골탑(牛骨塔)의 신화조차도 먼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 살인적인 학점경쟁과 살인적인 등록금과 살인적인 취업문. 이처럼 ‘살인적인’ 시대를 살면서도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리를 까닥거리는 대학생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고 안쓰럽다. 주어진 현실을 수락하고 긍정하는 그들 특유의 낙천성이 신기하고, 더 이상 현실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의 체념과 그 체념에서 비롯되었을 시린 자유가 안쓰럽다. 그래서 그들의 절규와 자살 소식은 더욱 가슴이 아프다.

    뜨거운 역사의식으로 들끓었던 60년대나 80년대의 4월에도 벚꽃은 피었고, 그때의 대학생들은 보편적 자유와 이념을 위해 꽃그늘 아래서 목이 쉬었다. 그리고 올 4월에도 벚꽃은 피었고, 지금의 대학생들은 취업과 생존이라는 더 근원적이고 절박한 이유로 꽃그늘 아래서 목이 쉰다. 어느 쪽의 절규가 더 가치 있는가는 단순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머리 위에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4월의 벚꽃이 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저마다의 절박함과 절실함으로 4월은 여전히 잔인하다는 것.

    김남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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