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작가칼럼] 봄의 생명력- 김영미(수필가)

  • 기사입력 : 2011-04-22 01:00:00
  •   


  • 논어를 읽고 나면 무덤덤한 이가 있고, 저절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쁨을 만끽하는 이가 있다. 암울하고 고단한 삶이 지속될수록 우리들은 심신의 매듭을 풀어 한 번쯤 땅을 밟고 춤을 추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진다.

    꽃망울처럼 부푼 가슴을 안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차창 밖에는 풀무질하는 바람에 어린잎들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깊은 사색에 잠긴 강물은 평상심의 느린 몸짓이 되어 흐른다.

    봄의 기억 속에는 사람들이 장구를 둘러메고 뒷동산에 올라 즉흥적이고 역동적인 춤을 추면서 구성지게 부르던 노랫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어려운 이웃을 찾아 정성 어린 손길과 마음을 나누는 삼백여 명의 봉사자 여인들과 봄을 맞으러 집을 나섰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본성이 부처의 자리라는 직지사 비로전 천불상 앞에 서서 합장한다. 간절한 그 이름을 부른다. 고요함, 인자함, 자애로움, 기쁨, 희망…. 표정마다 무언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듯하다.

    올봄은 전 세계가 인류의 적이라는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했다. 지구의 대재앙과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절망과 행복이라는 단어조차 무색하게 만들었다.

    24시간 특보를 읽어 간다. 삶의 터전을 잃고 무표정한 얼굴로 길 없는 길 위에 서 있다. 귀는 먹먹해지고 꽃은 현란하기만 하다.

    어느 해 나는 낯선 이국땅에서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일행들을 놓쳐버린 적이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불안에 떨면서도 안내자가 또박또박 일러주던 당부의 말이 번쩍 떠올랐다. 혹 길을 잃게 되더라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말 것이며, 아리랑을 부르거나 춤을 춘다면 어디선가 바람처럼 흑기사가 달려올 것이라 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춤과 노래는커녕 장시간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어야만 했다.

    나는 그 시점에서 향수에 젖은 아리랑을 부르거나 아찔한 심경을 표현하는 춤을 추었다면 어땠을까. 자유로운 끼와 여유를 부려보았다면 또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때로는 불행이 왜 나에게만 오는지, 무엇 때문에 내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살아야 하는지 묻곤 한다.

    머리에 시설( 雪)이 앉는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면 발길마다 살아온 경험이 눈 밝은 이로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어두운 내 안에 길을 비쳐보게 되는 것일까.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봄의 두들 소리를 감지하는 귀명창이 되고 싶다. 두려움을 떨치고 기원을 담은 신명 넘쳐나는 춤 한판 출 수 있으면 좋겠다. 논어를 읽은 후의 몸짓인 손발이 춤추는 수지무지족지도지자(手之舞之足之蹈之者)처럼 열정과 화합으로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가기를 염원해 본다.

    전통 춤꾼 ‘하람’ 정재성은 우리 춤을 한마디로 ‘꽃’이라 표현한다. 꽃은 절정의 자리를 버려야만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법당 안에는 일곱 송이 연꽃이 연밥을 물고 거꾸로 매달려 있다. 단청은 낡았지만 향기는 그윽하다.

    휘어진 길 따라 여인들의 웃음이 폭죽처럼 터지고 꽃잎의 낙화가 군무(群舞)를 이룬다. 서걱거리던 마른 풀숲을 헤치고 파릇한 생명의 기운들이 솟구치는 봄날이다.

    김영미(수필가)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