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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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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누이의 화전놀이- 최형일(시인)

  • 기사입력 : 2011-04-2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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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 들판에 꽂혀 흐느적대는 신기루 사이로 어느 쓸쓸한 풀꽃의 자손인 양 봄날은 분분(芬芬)하다. 아까부터 거제시 사등면 휴게소 툇마루에 나앉은 된바람은 동백꽃 붉은 입술에 화려했던 봄날을 속삭이더니 낭창낭창 윤기 밴 능수버들 머리채에 척척 동백기름 내음을 풍기는데 술 취한 한 무더기 화전놀이패를 부려 놓은 버스가 들어선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회갑 줄이 다 넘은 술 취한 누이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얼마나 달려 왔는지 시동이 걸린 채로 봄꾼 화투패처럼 한 장 열풍을 둥글게 말아 궐련 한 대를 꼬나물고 희뿌연 유행가를 입맛 나게 꺾어 불며 가쁜 숨 몰아쉬듯 그렁댄다. 하긴 요즈음 같은 시절에 노인층의 관광 나들이는 이곳 관광지에서 계절에 상관없이 연중 흔한 일이란다.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오다 늘그막 지난날을 보상 삼아 나선 유람을 탓할 수는 없겠으나 옛날과 달리 건강한 노년을 꼭 저렇게 대취하여 남은 봄날조차 가랑이 사이로 흘려보내고 있는 모습이라니 썩 좋아 보이지만은 않다.

    우리네 사회가 저출산 고령화로 접어든 지가 언제인데 노인층이 주로 살아가는 시골이나 도심의 공터에 그들을 위한 건전한 사회적 관심과 배려는 충분한 것인지 되짚어 볼 문제다. 경제발전에 따른 생활 향상으로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노인층은 더욱 두터워졌으며 육체적 노화현상, 정년퇴직, 경제적 수입능력 감퇴 등으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많은 지장을 받게 된 것이 현실이며, 이에 따른 경제적 고충, 고독감, 무력감 등에 빠지는 노인층이 확대되면서 노인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지 않은가. 1981년 ‘노인복지법’이 제정되어 노인문제 해결을 위한 사업이 여러 방면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노인복지 예산 및 정책면에서는 아직 미비한 단계인 것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지 않던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 넘게 붉을 순 없는 것이 세상일인데 뉘라서 뒷날 관광버스 안에서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길에 몇 개의 언덕을 넘어 막춤으로 의미 없이 흘려보낼 날을 피할 수 있겠는가. 다양화되고 복잡화되어 가는 현실적 사회문제에 대하여 예산 타령에 미뤄 둘 것만 아니라 헹구고 돌이켜 보며 사회화 기관마다 그들의 노련한 삶의 지혜를 리사이클링(Recycling)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돌이켜 보라. 저 누추한 뽕짝버스가 끌고 가는 봄 마장 길에 늙으신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고 나이 든 누이가 추억만을 되새김하며 현실을 비켜가게 내버려 둔다면 이 얼마나 가련한 짓이며 한낱 값싼 사회적 비용만으로 우리네 눈들을 용서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오래 정박 중인 배는 끄덕끄덕 삶의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너른 바다 한구석에서 지느러미를 움직여 와닿는 물의 감촉으로 따스한 위안을 삼지만 벌써 떠났는지 잠잠한 관광버스 뒤에 남겨진 팽팽한 비밀뭉치의 의욕은 닻에 매달려 바다에 덤비는 깃처럼 쓸쓸하더라.

    아마도 이쯤일 것이다. 못자리를 잡아 놓고 청보리가 다 패기 전이면 분 바르고 꽃단장한 늙으신 어머니가 화전놀이를 다녀오시며 동네 어귀에 마중 나온 내 유년을 끌어 안고 흥얼거리던 그 노래가 시큼한 막걸리 맛처럼 왜 그리 섧게 목을 걸걸하게 하며 명치 끝을 아프게 했던지, 나는 예사로 하이얀 살구꽃만 바라보며 모른 척했다.

    TS 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신록은 날로 푸르게 짙어 가는데 산 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 피고 지는 날을 함께했던 세월이 색 바래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음이다.

    오고가는 세월이야 어찌 하겠는가. 다만, 겨우내 참고 견디며 용서하는 날이면 봄은 다시 들고 새들은 노래하리란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가지 않던가. 짙고 옅은 차이야 있겠으나 읊조리는 저 꽃놀이 판이 사회화 기관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비록 화려한 봄날이 저문 뒤라도 지금보다야 더 흥겨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최형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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