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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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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베어낸다는 것- 황시은(시인)

  • 기사입력 : 2011-05-2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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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만 생태공원. 나무로 길게 이어진 탐방로 위에 아이들이 갈대밭을 들여다보고 있다. 갯벌 위엔 농게와 짱뚱어가 진흙 팩을 잔뜩 바른 채 뒤뚱거리며 횡단을 한다. 갈대밭은 게들과 짱뚱어에겐 안전한 은신처가 되어 주고 있다. 봄이면 주민들이 탐방로 주위의 갈대들을 베어낸다고 한다. 그래야만 가을에 멋진 갈대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손에 든 오렌지 껍질을 한 입 베어 문다. 시큼함과 쓴맛이 순간 혀끝에 묻어난다. 준비하지 못한 칼 대신 치아를 이용하여 베어낸 것이다. 그 속에 알알이 박힌 과육을 먹기 위함이다.

    나는 벌레 먹거나 썩은 부위가 있는 과일을 사 먹곤 한다. 맛이 있는 과일일수록 벌레가 먼저 알고 맛을 보는 것이라던 어르신들의 말씀을 믿는 탓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깨끗이 씻어 한입 베어낸 후 껍질째 먹는다. 가족들이 염려를 하긴 하지만 결실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이라 여기며 먹는 것이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시리도록 다정하다. 아들도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있을 터인데. 사춘기를 심하게 앓다 지각생으로 내년이면 대학생이 된다. 학교 대신 오락실과 피시방을 돌며 크고 작은 문제들이 아이를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학교란 우등생과 모범생만을 원한다는 판단에 따라 반강제적인 자퇴를 하게 되었다. 아이는 묶였던 쇠사슬에서 벗어난 해방이라 했다.

    첫돌이 되기 전 친모에게서 버림을 받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 한겨울에도 반팔 셔츠를 입고 와 밥솥 바닥의 밥알까지 먹고서야 웃어주던 아이. 타고난 재주가 공을 아주 잘 다루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야구부 감독의 눈에 띄었지만 도중에 불우아동이라는 이유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렇게 소속에서 베어진 아이들은 훔쳐야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누군가를 폭행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베어짐이 모범생만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으로 인식해 가고 있었다.

    구제역으로 온 국민이 몸살을 앓았다. 방역과 백신접종 그리고 살처분까지 했지만 쉽게 멈추지 않았다. 살아 있는 가축을 산 채로 땅에 묻는다는 것이 어찌 피눈물 없이 가능하겠는가.

    암에 걸리면 다른 조직으로 전이가 되지 않도록 그 부위를 잘라낸다. 몸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다.

    기업도 정부도 살아남기 위해 불합리하고 잘못된 것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면 자멸하고 만다. 살아가면서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해 낭패를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나 익숙해진 것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글쓰기도 잘라내는 작업이다. 처음 만난 좋은 문장을 버리지 못할 때가 있다. 자신이 즐겨 쓰는 문장에 도취되어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과감히 잘라내고 정리를 해야만 멋진 문장이 완성되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란 버리고 비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나를 비울 때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마가 지나간 정원은 일주일이면 어김없이 잔디에 칼날을 들이대어야만 한다. 잔디에서 묽은 피비린내가 나는 것은 베어짐에 대한 눈물의 발산일 것이다. 전정을 하고 나면 끝 부분에 고이는 액체 또한 베어짐에 대한 피눈물일 것이다. 베어짐은 언제나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만 또 다른 탄생을 맞는 것이다. 아들도 그 친구도 어머니 자궁에서 이어진 탯줄과 분리되는 순간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순천만을 뒤로하고 돌아나오는 주차장 옆 가장자리에 자운영이 피어 있다. 저 꽃도 져야만 씨를 남기고 다시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는 더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다. 순천만의 갈대를 베어내듯 마음의 웃자란 잡념들을 비워내고 돌아오는 길목마다 만개한 찔레꽃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황시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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