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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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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61) 황강 9 거창군 주상면~웅양면 한기리

그윽한 숲 따라 고목, 고택, 돌담길 이어져…

  • 기사입력 : 2011-06-1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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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향기 돌담마을 입구의 길게 이어진 솔숲이 운치를 더한다.
     
     
    매년 봄이면 꼭 잊지 않고 찾아오는 고마운 제자들이 있다.

    재학시절 학업 성적이 뛰어나서 명문대학에 진학을 했거나 사업가로 성공해 부자가 된 학생들은 결코 아니다.

    항상 올곧은 마음으로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제자들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급속한 산업화로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진정한 교육은 교육자의 열정과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진정 가장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봄의 끝자락이다.


    연교리 성황단
    송병선 책판


    ◇ 연교리 성황단·성암사·송병선 책판

    어느덧 꽃이 지고 오종종한 열매를 맺은 주상면 내오리 고인돌 부근의 사과밭을 뒤로하고 덕유산에서 내려오는 황강천을 따라 내려서면 국도 2번 도로변에 성암사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 방향으로 콘크리트 교량을 건너면 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도 손색이 없는 연교리 성황단이 있다. 주변에 있는 소나무가 성황단을 안고 보호하고 있는 듯 가지가 길게 뻗어 있었다. 성황단의 안내판이 없어 인근 밭에서 일을 하는 노인 부부에게 내력을 물었으나 모른다고 했다.

    마을 이장을 지낸 김광선(50)씨를 만나 물었더니 연교리 임실마을 지형이 양쪽에 산으로 둘러 있는데 왼쪽 산의 길이가 짧아 균형을 맞춘다고 만들어졌다고 했으며 마을의 액운을 막아달라고 매년 정월 대보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마을에는 지금까지 큰 액운 없이 평화롭게 잘살고 있다고 했다.

    임실 마을 방향으로 200m쯤 오르다 중간쯤에서 오래된 돌담길을 따라 방향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가면 흙 돌담장에 솟을대문이 있는 성암사가 있다. 대문에는 굵은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이곳은 이주환 선생과 그의 스승 송병선, 송병순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후손 이창원(53·☏ 011-550-7222)씨가 직장이 거창읍내인데 순전히 성암사 관리를 위해서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집 쪽으로 난 쪽문을 열어주며 안내를 했다. 평소에는 도난이 잦아 문을 열어 놓을 수 없다며 건물의 문짝, 현판까지 떼어갔다고 했다.

    송병선과 그의 동생 송병순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상실되자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자결했고, 제자 이주환은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자신의 민적을 찢어버리고 순국했다.

    굵은 자물쇠가 잠겨있는 대문을 지나면 성암사와 송병선의 문장·시·죽은 자의 이력과 행적을 기록한 행장 등을 판각한 목판본 53권 1942매를 보관하고 있는 서고가 있다. 경남 삼가 창계원에서 간행되어 무주구천동 서벽정에 보관했으나 6·25전쟁 뒤 송병선의 위패를 안치하고 있는 이곳으로 옮겼다. 성암사는 매년 제사를 지내며 거창 유림들을 교육하는 유서 깊은 역사적 장소가 되고 있다.




    ◇솔향기 돌담마을·동호리 이씨고가·영은고택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성암사를 나와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문화재자료 제100호 ‘성기성’을 입력하고 출발을 하는데 내 판단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꾸 안내를 했다. 안내를 무시하고 최근에 개통된 도로를 따라 산을 넘는데 계속해서 길을 잘못 들었다고 반복하는 음성이 나왔다.

    작은 산을 넘어 고개를 내려오다 숲속에 가려진 오산마을 작은 성황단을 만났다. 성황단 부근에서 만난 사람에게 물었더니 옛날에 마을의 화재 예방을 위해 조성되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성황단이 만병통치약 역할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봄꽃들이 화려하게 핀 길을 내려가니 처음 안내를 했던 도로와 만나는 교차로였다. 지름길로 온 것이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라고 해도 때로는 사람의 판단이 옳을 때가 있다.

    김천과 연결되는 국도 3번을 따라가는 길은 경북 김천 국사봉에서 발원해서 황강으로 흘러드는 맑은 계수천을 끼고 있었다. 성기성 부근에서 논에서 일하는 웅양면 동호리 성북 마을 이명거(70)씨에게 ‘성기성’의 위치를 물었더니 만류했다. 산에 성의 흔적은 군데군데 남아 있는데 허물어지고 산세가 험해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는 속담처럼 성기성 찾아가던 길을 돌려 웅양면 소재지에서 동호교를 건넜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를 따라가면 아름다운 숲과 문화가 공존하는 솔향기 돌담마을이 있다. 마을입구에는 동호숲 막돌탑이 수문장처럼 반겨준다. 오래된 고목나무 옆에 마을의 유래를 가늠할 수 있는 비석들이 있고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거북 받침 위에 세워진 쌍청당의 비석이다. 돌담장이 고즈넉한 마을 위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마을길과 하천바닥을 온통 콘크리트로 포장을 해서 솔향기 돌담마을의 정취를 반감시키고 있었다. 동호리 이장 이광화(68)씨의 말에 의하면 2002년 8월 말경 우리나라에 상륙한 태풍 루사 때 마을에 피해가 많아 복구를 하면서 콘크리트 포장을 했다고 한다.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을 위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동호리 이씨고가가 있다. 솟을대문에 긴 돌담이 매우 곱다. 조선 순조 10년(1810) 이진악이 지은 집이다. 건물의 특징은 방과 대청 앞면으로 반 칸 폭의 개방된 툇마루가 놓여 있고, 뒤로는 반 칸 폭의 벽장과 툇마루가 붙어 있다. 사랑채 가운데 방을 앞면으로 약간 돌출시켜 앞면 마루가 가운데 1칸만 반 칸 폭 크기이다. 일정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생활에 맞게 지은 집으로 남부지방 민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옆에 있는 영은 정사는 동호리 이씨고가의 아래쪽에 담장을 공유하는 집으로 1884년 이준학이 4형제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차남 영은 이현석에게 준 집이다.


    포충사 대문


    하성 내부의 우물

    ◇ 포충사·하성·경덕재

    솔향기 그윽한 돌담마을을 나와 웅양면 사무소 뒤편에 있는 포충사로 향했다. 이곳은 조선 영조 4년(1728)의 무신 난 때 순절한 이술원의 위패가 있는 사당으로 영조 13년(1737)에 세웠다. 이술원은 조선 후기 무신이며 거창 출신으로 영조 4년(1728)에 거창 좌수로 있었다. 안의의 정희량이 난을 일으키자 나아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생포돼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죽임을 당했다.

    거창군 웅양면 오기리에 있는 하성을 답사하기 위해 웅양면 사무소에 들렀더니 하기리 이장 최충식(43)씨를 소개해 주었다. 최 이장을 만나 희미해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성벽이 산 정상부를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 나타났다. 성은 잡초가 무성하고,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해 쌓았는데 대부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성의 전체 길이는 약 1500m, 온전한 곳의 높이는 2m 정도이고 성안에 물이 있어 예전에 경작지로 이용했다. 삼국시대 백제가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남매가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누이가 치마로 돌을 담아 날랐다고 해서 치마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내려와 경북과 경남의 경계 지점 인근 한기리 마을 경덕재를 찾아갔다. 원래는 묘소 아래 재실로 건축하였으나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건물 곳곳에서 일본식과 중국식, 한국식의 건축양식이 절충식으로 지어진 부농 주택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최충식 이장의 말에 따르면 우리 농촌도 젊은이들이 귀농할 수 있는 토대가 점차 마련되고 있다고 했다.


    ☞ 여행 TIP 맛집

    ▲곰내미 가든: 염부영. ☏ 055)944-3303. 거창군 웅양면 군암리 55-1. 토종닭 백숙전문: 3만5000원/4인, 오리백숙: 4만원/4인. 산골별장 같은 분위기가 있는 곳으로 토종닭은 직접 사육하며 산에서 채취한 무공해 산나물을 제공하고 있다.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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