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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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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빚 권하는 사회- 허충호(논설위원)

카드사 과열영업·중도금 무이자 대출·금리인상, 그 끝은…

  • 기사입력 : 2011-06-2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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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대고축(債臺高築)이란 말이 있다. 빚이 너무 많아 갚을 길이 없는 상태를 빗댄 말이다. 고사성어의 유래는 중국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제후국 중 하나인 진(秦)은 국력이 강성해지자 자주 주변국을 침략했다. 초(楚) 효열왕은 연합국을 결성해 대항하는 한편 주(周) 난왕에게도 진을 공격토록 했다. 난왕은 전후 이자까지 얹어 갚겠다는 조건으로 부호들에게 돈을 빌려 출전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얻은 게 없자 부호들은 궁으로 몰려와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다. 난왕은 빚쟁이들을 피해 궁 안의 높은 누대에 숨어 근심과 두려움에 떨었다. 가계대출 규모가 1000조원을 넘어섰다는 보도에 문득 이 고사가 생각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현재 가계부채는 801조4000억원으로 사상 최초로 800조원을 돌파했다. 사실상 개인으로 분류되는 영세사업자의 빚까지 포함하면 개인 금융부채는 1000조원대다. 여기에는 또 다른 복병이 있다. 바로 전세보증금이다. 이게 참 요상하다. 전세가격이 꾸준히 오를 땐 문제가 없지만 가격이 떨어지면 바로 부채로 돌아서니 집 한 채로 전세수입을 노리는 임대인들로서는 양날의 검을 안고 사는 셈이다. 이런 전세자금에 계수에는 잡히지 않는 대부업의 부채와 사채를 감안하면 가계가 안고 있는 빚은 1000조원대를 넘어도 한참 넘어섰을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의 가계부채가 가처분 소득의 155% 수준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풀어 보면 한 가구가 당장 쓸 수 있는 돈을 모두 빚 갚는 데 써도 1년 반이 걸린다는 얘기다. 지난 2003년 카드 대란 때의 130%,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론 파문 때의 137%와 비교하면 현재의 가계부채가 어느 수위까지 오른 것인지 짐작 가능하다.

    전문가집단은 오랜 기간 이어진 저금리정책을 문제의 한 원인으로 돌린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돈 필요한 서민에게 금리 운운하는 것은 ‘사치’다. 급하게 쓸 생활비는 느는데 가진 것이라곤 집 한 채뿐인 중산층은 금리불문하고 집을 담보하고 빚을 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게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대형금융기관들의 무차별적 대출세일과 박자가 딱 맞았다. ‘빚 권하는 사회’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금융감독원의 자료는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국민, 우리, 신한, 하나, 농협, 기업은행의 1분기 가계대출은 2조5000억원 늘었다. 국내 가계대출 증가액의 40% 수준이다. 주택담보대출은 이들 은행에서 3조7000억원 늘었다. 은행권과 비은행권 주택담보대출 증가액 7조2000억원의 51%가 이들 은행에서 집중적으로 증가했다. 짐작한 대로다. 여기다 신용카드사들의 과열 영업경쟁과, 일부 카드 사용자들의 무분별한 소비 행태에, 빚을 내 투기성 투자를 하는 이들까지 가세했으니 가계대출이 느는 것은 당연하다.

    급기야 금감원은 6개 은행에 과당경쟁을 자제토록 하고, 금융위원회는 신용카드사 등의 과도한 외형확대 규제대책을 발표했다. 일부는 자본주의 경제정책이 맞나 싶을 정도의 강수도 있다. 금융통화위원회도 저금리기조를 깨고 기준금리를 연 3%에서 3.25%로 올렸다.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금리도 거의 30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주택담보대출을 받거나 카드로 돌려막기를 해오던 가계들로서는 이제 금리와 신규대출 억제라는 시련을 맞고 있다. 이자만 내고 버티는 대출비율이 지난해 말 기준 78.4%에 달한다는 보고서에 기초해 본다면 최근의 이자 인상 추세는 보이지 않는 대형폭탄이다.

    최근 들어 신규 분양되는 아파트들도 새로운 가계 빚 창출에 한몫한다. 건설사들은 중도금 무이자 대출을 내세워 분양을 유도하니 소비자들로서는 귀가 솔깃해진다. 붉은 글씨의 ‘무이자’는 언젠가는 갚아야 할 채무라는 사실을 깜빡 잊게 하는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빚 권하는 사회가 가계를 주나라의 난왕으로 내몰고 있다. 채대고축 우려가 금리인상이라는 광풍과 함께 높아지고 있다. 잇따라 발표되는 가계부채 대책이 혹여 채대고축의 전조는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허충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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