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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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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콘서트 2題- 김명희(시인)

  • 기사입력 : 2011-07-0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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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고 작은 콘서트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콘서트(concert)는 음악회, 또는 연주회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제 콘서트를 음악에 한정짓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융합의 시대를 거스르는 것이리라. 굳이 공연장 주위가 아니더라도 콘서트를 알리는 포스터나 현수막은 쉽게 눈에 띈다.

    이처럼 관심만 기울이면 누구나 콘서트에 참여할 수 있다.

    지난 6월 12일 ‘시가 있는 장미 음악회’가 장미공원에서 열렸다. 지역 예술인들이 마련한 시와 음악(클래식, 대중가요)이 어우러진 작은 콘서트였다.

    지역의 명소가 된 장미공원이라 그런지 꽃이 시드는 6월 중순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였다. 객석의 의자는 일찌감치 주인을 찾았고, 무대 주변에는 가족끼리 돗자리를 깔고 모여 앉았는가 하면 또 서 있기도 했다.

    나의 첫 시집인 ‘향기로운 사하라’의 표제작인 ‘향기로운 사하라’는 장미 품종인 ‘사하라’를 만나고 쓴 작품이다. 굳이 말하자면 장미공원은 내 작품의 고향인 셈이다. 이래저래 장미공원은 벌써 내게 있어서 이야기가 있는 공원이 되었다.

    시는 낭송만으로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장미와 음악이 어우러진 곳에 시가 있다면, 그곳에서 시를 만난다면 누군들 가슴이 서늘하지 않으랴.

    비록 시의 내용은 정확하게 몰라도 장미향을 음미하듯 서서히 시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아주 특별한 콘서트가 있다. 도서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는, 매주 한 번씩 5주에 걸쳐 열리는 ‘인문학 평전 콘서트’다.

    동서양 고전을 넘나드는 강사진은 너무나 유명한 수유너머+공간의 연구원들이다.

    그들은 인문학이 죽어가는 시대를 우려할 때 과감하게 대중 속으로 뛰어든 선구적인 자들이다. 그들은 강연과 베스트셀러라는 홈런을 날리며 달리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그들의 콘서트가 뜨자 정원 외의 사람들이 몰려올 만큼 인지도 또한 높다. 그에 걸맞게 알차고 좋은 강연은 물론이었다.

    강연이 끝날 때마다 너무 좋았다는 사람들의 반응과는 달리 나는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콘서트는 앎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함께 느끼는 것이다. 만남으로 알게 되고 앎으로 통(通)한다.

    통(通)은 바로 느낌(感)이다. 그것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다. 객관성 있는 확실한 것보다는 약간은 주관적인, 사람 냄새가 나는 강연이 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아니었으면 사람들이 쉽게 모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두 콘서트의 수요자 계층은 다르다. 전자가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라면, 후자는 인문학에 관심 있는 자들 내지는 독서를 꾸준히 하는 자들이다.

    전자는 수요 공급 모두 지역민이었다. 그러나 일회성이 아니라 장미가 활짝 피는 계절에 맞춰 몇 차례 이뤄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자는 공급에서 지역민이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이 또한 일회성이 되기 쉬운 우려부터 든다. 하지만 두 콘서트 모두 지속되기를 바란다. 수요가 있는 한 공급을 중단할 수 없다.

    우연찮게 두 콘서트 모두 창원시 성산구에서 이뤄졌다. 특히 성산구는 기업체와 주거지가 밀접한 곳이다. 그만큼 정서적 계층도 다를 수 있다. 그 간극에 시민들 스스로 공급·수요자가 되는 콘서트가 열렸으면 한다. 그것의 기획자가 누구이든 주체가 우리라면 지역 문화로 뿌리 내릴 수 있다.

    문화의 자생력! 그것이야말로 시대의 소명에 부합하는 진정한 융합이 아닐까 싶다.

    김명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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