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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해 쪽물장이 김광수씨

“쪽물은 색 만드는 것 아닌 생명을 만드는 것”

  • 기사입력 : 2011-07-1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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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년간 쪽물 염색을 연구 중인 김광수씨가 김해시 생림면 소도마을에서 직접 재배한 쪽잎으로 물들인 원단을 살펴보고 있다./김승권기자/
     
     
    40대 후반에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 의사가 폐암 말기라고 했다. 몇 개월간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는 않았다.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쪽염이나 해보자 생각했다. 속세의 일을 버리고 쪽물을 만들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자락에서 홀로 쪽을 재배하고 쪽잎을 일일히 따서 자신만의 쪽물 만들기를 15년째 해오고 있는 김광수(64)씨는 잊혀진 우리나라 고유의 쪽염법을 찾아, 그 맥을 잇도록 하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는다.


    쪽에 눈을 떠다

    김해시 생림면 나전리 509. 김씨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갔지만 공터만 보인다. 15분 뒤 소박한 옷차림의 김씨가 무쏘 차량을 끌고 나와 타라고 손짓을 한다. 무쏘 차량을 타고 산속의 꼬불꼬불한 길을 1㎞ 정도 갔을까. 소도마을이란 글귀가 새겨진 큰 돌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자 허름한 집 한 채가 보인다. 김씨는 이 마을에 혼자 살고 있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그는 배고픔도 잊은 채 그동안 묻어 놨던 ‘쪽물인생’을 풀어놓는다.

    김씨가 쪽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때는 18년 전이었다. 어릴 적 사찰에 한 스님으로부터 불교 교리 교육을 받던 중 불교와 떼어놓을 수 없다는 쪽 이야기를 듣고 반짝 관심을 가졌었지만 이후 거의 40년 동안 잊고 살아왔다. 출판사를 운영하며 ‘잘나갔던’ 그는 1993년 5월 어느 날 전통사찰음식연구소에서 또다른 스님으로부터 쪽 이야기를 듣고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어릴 때부터 쪽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불교의 색이 바로 쪽이었고 굉장히 신비롭다고 생각했는데 40년이 지나서 다시 쪽 이야기를 듣고 쪽염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이후 그는 전라도 이남 방식, 일본 스쿠모 방식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까지 쪽염을 하고 있는 곳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쫓아다니면서 자신만의 쪽염법 터득에 열을 올렸다.




    쪽염이나 하고 죽자

    2년여 만의 연구로 김씨는 어릴 적 스님으로부터 들었던 쪽염의 비법을 깨달았다. 불교 교리를 통해 들었던 쪽염법은 석회(조개껍데기 가루)를 쓰지 않고 쪽잎에서 뽑은 원액을 발효시켜 바로 염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전라도 이남 방식과도 일본 스쿠모 방식과도 달랐다.

    “전라도 이남 방식은 쪽을 대궁(쪽 줄기)째 물에 재워서 쪽물을 내기 때문에 농축액을 얻을 수 없다. 이것으로는 염색이 안 된다. 그래서 염료를 농축시키기 위해 석회를 넣는다. 이는 우리나라 전통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쪽염법을 어릴 적 스님이 붙여준 이름을 따 ‘고담법’이라고 붙였다. 자신감에 찬 김씨는 본격적으로 고담법을 실행해 볼 차례였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1995년 말에 갑작스럽게 폐암이 그의 몸에 찾아온 것이다. 폐 속에 이미 암이 다 파고들어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을 오가며 방사선 치료를 수개월간 받으면서도 쪽염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출판사도 접고 산속에 들어가서 쪽염이나 해보고 죽자고 결심했다. 쪽염에 대한 열정은 이전보다 더 강했다. 불교 교리에서 배웠던 것처럼 쪽이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신비스러운 힘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씨가 처음부터 여기 소도마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폐암 진단을 받은 후 1996년 초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깊숙이 있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김해시 진례면 고모리 인근 산속으로 거처를 옮겼고, 1년 전 소도마을에 정착했다. 그렇게 15년 동안 산속을 찾아 전전하면서 암도 잊은 채 지금껏 쪽물에 심취하고 있다.



    쪽물은 생명이다

    김씨의 고담법은 사람의 손일과 시간이 이만저만 필요한 게 아니다. 땅을 일구어 1년에 한 번 쪽 씨앗을 심고 가을철에 쪽잎을 한닢 한닢 따서 물에 재우는 작업을 혼자서 한다. 이렇게 만든 원액(인디고)은 일정 온도로 유지하면서 발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염색을 할 수 있는 쪽물이 된다.

    “1년 쪽 농사 지어서 손으로 일일이 잎을 따서 하려다 보니 대량으로 만들 수도 없다. 돈을 벌 욕심이었다면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좀 더 수월하게 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힘든 방법을 고집하는 데는 쪽물은 색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원래 쪽물은 색이 없다. 무색이다. 불교의 경전, 불화(佛畵)에는 7~8차례의 쪽염 처리가 돼 있다. 이들 문화재는 천년을 간다. 오래전 우리 민족은 남색을 내려고 쪽물을 쓴 게 아니라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쪽물에서 신비스런 힘이 나오는 것은 쪽물 자체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인체에도 이로운 것이다.”

    쪽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미생물이 살아숨쉬고 있는데 이 미생물이 유물을 천년이 가게 만들고, 사람의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건강도 지켜준다는 것. 예전 할머니들이 쪽염 베를 장롱 속에 넣어 가정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고자 했던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교수든, 제자든, 누구든, 쪽물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화를 참지 못한다. 미생물이 죽어버려 화가 치민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쪽물이 미생물이다 보니 똑같은 것을 가지고 염색을 해도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 쪽물은 1~2도의 온도 차이에 큰 반응을 일으키고 죽어버릴 수 있어 생명을 다루듯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제대로 염색이 묻어나지 않는다.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왜 그런 신비스런 효과가 나타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같은 믿음에 그는 먹을 수 있는 쪽물도 따로 만들어 마시기도 한다.



    잿더미 된 15년 쪽물인생

    그런 그에게 15년 쪽물인생이 한꺼번에 날아가버리는 화재가 발생했다. 올해 2월 초 아침에 목욕을 갔다와 보니 목조 작업실이 다 타버려 그동안 모으고 만든 자료와 쪽염 원단들이 잿더미로 변해 있는 것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쪽염옷밖에 없었다. 쪽염에 대한 책 한 권 내지도 못했는데 모든 게 없어져 눈앞이 캄캄했다.”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제자들이었다. 3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쪽염을 배우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받자 한 명씩 떠나버렸고, 화재가 난 후 자료가 아예 없어져 이제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제자들이 이 쪽염법을 이어가길 원했는데 다 떠나서 너무 아쉽다. 돈벌이가 안 되니까 떠난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돌려 먼산만 바라봤다.



    쪽염의 맥, 다시 살린다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일이 쉽지 않지만 우리 고유의 쪽염법을 꼭 전수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쪽염을 하고 있다. 다행히 김해에서 찾아온 몇몇 수강생들이 도와 주고 있어 힘이 된다. 그는 고담법을 담은 책을 준비하는 한편, 대한민국명장회에 명장 후보 접수도 해놨다. 이제는 자신만의 고담법을 마무리 짓겠단다.

    “쪽은 상당히 중요하다. 150년 전까지만 해도 사찰에서 살아 있었던 우리 고유의 쪽염은 궁핍과 핍박 속에 사라졌고 다시 쪽염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많이 잃었다. 앞으로 내가 하는 쪽염법이 알려지고 보편화돼 세상에 제대로 남아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겠다는 심정으로 쪽염을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이 쪽염을 이어갈 쪽빛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글= 김호철기자 keeper@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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