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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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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② 송창우 시인이 찾은 '경상남도수목원'

나무는 한번도 캐묻지 않았지만
내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 기사입력 : 2012-06-1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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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남도수목원을 찾은 방문객들이 가로수 길을 걷고 있다.


    연못에 비친 정자와 수목이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내고 있다.
     

    수목원역에 들어서는 무궁화호 기차.
    수목원 안에 있는 연못.
     

    연못에 핀 수련.


    송창우 시인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보석처럼 박히는 정오. 들일을 나왔던 사람들도, 느티나무 그늘에 앉았던 노인들도 잠시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땡 땡 땡 땡 경음을 울리며 차단기가 내려간다. 때 이른 여름 햇볕에 늘어져 있던 철로가 팽팽해진다.

    기차는 동구 밖 언덕을 돌아서 온다. 기차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그렇게 직선의 몸을 무너뜨리며 부드러운 곡선을 보여주는 순간이리라. 이마 한가운데에 보석처럼 등불을 하나 박은 기차는 허리를 한껏 휘며 천천히 감돌아 와선 이내 허리를 쫙 펴고 멈춘다. 1941호 경전선 기차. 부산 부전역에서 출발해 순천까지 가는 기차가 잠시 멈춘 곳은 진주시 일반성면 개암마을에 있는 수목원역이다. 우리나라에서 역명에 수목원을 붙이고 있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그러니 이 역에 내리는 사람들은 개암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수목원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몇 년 전 마산역에서 이 기차를 타고 수목원역에 내려 본 일이 있다. 가을 무렵이었는데 금빛 들녘의 한가운데를 통과한 기차는 원북역, 평촌역을 지나 이곳에 나를 내려놓았다. 기차에서 머문 건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그날 눈에 비친 차창 밖의 풍경은 보고 또 보아도 지루하지 않는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 남았다. 아마도 내가 탄 기차가 KTX였다면 그 풍경들은 뒤죽박죽 섞이기도 했을 터이지만 경전선엔 KTX가 없고, 수목원에 멈추는 기차는 오직 무궁화호뿐이어서 창밖의 풍경들은 느릿느릿 온전하게 기록되었다.

    그 후로 나는 수목원으로 오는 기차를 타 본 일이 없다. 수목원 가까이로 이사를 온 까닭인데, 만약 다시 기차를 타게 된다면 이제 수목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산역에 내리게 될 것이다. 비록 순서만 뒤바뀌었을 뿐 기차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같을지라도 나는 도시로 가는 기차는 타고 싶지가 않다. 대신 자주 이곳에 나와서 도시에서 수목원으로 오는 그대를 기다린다. 정오. 역사도 없고, 역무원도 없고, 오직 벤치 하나밖에 없는 역에서 그대를 기다리곤 한다.

    가끔 혼자라는 외로움이 깃들 땐 철길 옆에 서 있는 700년 된 느티나무에 기대앉기도 하고, 기차를 기다리는지 손님을 기다리는지 삼색등이 돌던 오래된 이발소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제 삼색등은 멈추고 이발소는 문을 닫았다. 꼭 한 번은 철길 옆 이발소 의자에 앉아 거울 속으로 기차가 들어왔다 사라지는 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내 소원 한 가지는 이제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어디 사라지는 것이 이발소뿐이랴. 올해 말쯤 군북역에서 반성역까지 직선으로 관통하는 경전선 복선화 공사가 완료되면 이제 이곳으로 오는 기차도 사라질 것이고 수목원역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그전에 부디 기차를 타고 오시라.

    수목원역에서 나무데크길을 따라 한 삼백 미터쯤 걸으면 수목원이 나온다. ‘경상남도수목원’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냥 ‘반성수목원’이라 부른다. 수목원은 17만 평에 10만 그루의 초목들이 자라는 식물 나라다. 이곳에서 더불어 사는 식물은 그 종만도 1500종이나 된다.

    고작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으로 구분 짓거나, 고작 이백여 개 나라 사람으로 구분 지으며 서로 다투고 사는, 사람의 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나라다. 그래서 나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날들에도 수목원을 찾고, 삶의 리듬과 평화가 깨어지는 날들에도 수목원을 찾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숲은 현대인의 분열증을 치유하는 병원이다. 이곳에 사는 의사들은 내 일상을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근엄한 눈빛으로 나를 억누르며 군림하지도 않는다. 내 엉덩이를 까고 아픈 주사를 놓는 일도 없다. 그저 내 생각의 혼잣말들에 동감하며 잎사귀를 살짝 팔랑거리거나, 나이테의 깊숙한 곳에서 한 다발 꽃을 꺼내어 줄 뿐. 그런데도 수목원을 한 바퀴 돌아나오면 놀랍게도 내 마음의 병들이 낫는다.

    글쓰기도 잘 되지 않고, 책을 읽는 일도 지겨워질 때 나는 또 수목원으로 간다. 시인 이원규의 말처럼 ‘나무는 살아서도 책이요, 죽어서도 책이다.’ 반성수목원에는 10만 그루의 나무들이 있으니, 이곳은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장서들을 갖춘 도서관이다. 그것도 어느 하나 어설픈 책이 없는, 하나같이 아름답고 생생하고 빛나는 명작들이다.

    그러니 세상의 어느 도서관에 견주랴. 소나무나 느티나무는 일생을 읽어도 지겹지 않고, 하루 사이에 피고 지는 꽃들은 종일을 읽어도 향기롭다. 대개의 나무들마다 이름표가 있으니 우선 나무들의 이름을 한번 소리 내어 불러주고 나뭇잎을 읽으면 된다. 떡갈나무는 두껍고 널찍한 잎사귀에, 미국단풍나무는 오리발자국 같은 잎사귀에 시를 써놓았는데, 나는 한 번도 같은 시를 본 일이 없다. 볼 때마다 새로운 신작시들을 내어놓는데, 그 놀라운 열정이 부럽고, 해묵은 시들만 만지작거리며 무늬만 시인으로 사는 내 삶이 부끄럽다.

    나무들이 나이테에 새겨놓고 있는 보다 내밀한 언어들을 읽으려면 나무에 한 걸음 더 다가가 부둥켜안고 귀를 대어 보면 된다. 두근두근 심장소리가 내 심장을 뛰게 하고, 졸졸졸 물관을 흐르고 있는 물소리가 내 핏줄을 따라서 온몸을 돈다. 만약 그렇게 해도 잘 들리지 않는다면 청진기를 대어 보라. 틀림없이 나무들의 내밀한 소리들이 들릴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청진기를 내 가슴에 대어 보라. 나무들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나무들의 내밀한 언어를 잘 듣지도 읽지도 못하는 것은 필시 내가 탈이 난 까닭이다.

    수목원에는 곳곳에 크고 작은 연못들도 있다. 수면을 덮고 있는 수련잎 사이에는 하늘에 뿌리내린 나무들도 있고 구름 속에 핀 꽃들도 있다. 소로우는 월든 호수를 눈동자로 묘사하면서 호숫가에 자라는 키 작은 나무들은 속눈썹, 호수를 둘러싼 키 큰 나무들은 검고 짙은 눈썹이라 했는데, 반성수목원 꼭대기에 있는 산정연못에 가면 그의 묘사가 얼마나 적절한지를 깨닫게 된다. 하늘을 보며 맑은 눈을 뜨고 있는 수목원의 얼굴은 참으로 아름답다.

    만약 내가 수목원을 함께 거닐어도 좋을 애인 한 사람을 갖게 된다면, 내 애인은 저 연못 같은 눈을 가진, 연못가에 늘어진 국수나무 같은 속눈썹을 지닌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애인과 함께 시간을 꾹꾹 눌러 밟아가며 수목원을 거닐다가, 멀리 서쪽에서 오는 기차가 저녁노을을 끌고 수목원역을 지날 무렵, 반성장에 앉아서 국밥 한 그릇을 먹었으면 한다. 그런 기대를 품고 자주 수목원을 가기도 하는데, 행여 아내여, 이 글을 읽는대도 상심하지 마시라. 나는 자주 수목원역에 앉아 어떤 그대를 기다리지만 어떤 그대는 아직도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글·사진= 송창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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