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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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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35) 송창우 시인이 찾은 통영 수월리

아,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비린 그리움
잔잔한 바닷가엔 아프레 달 같은 숲이 있고
겨울에도 들녘엔 연둣빛이 감도는 곳이지요

  • 기사입력 : 2013-02-2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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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화산에서 바라본 수월리와 미륵산.
    글·사진=송창우


    여행을 하다 보면 그대로 한철 눌러앉고 싶은 마을을 만나기도 합니다. 수월리. 잔잔한 바닷가에 아흐레 달 같은 숲이 있고, 겨울에도 들녘에 연둣빛이 감도는 마을. 낮에는 부둣가에 앉아 낚시를 하고 밤에는 파도소리 들으며 나는 한철 수월리에 눌러앉고 싶었습니다. 그건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것입니다. 이모저모 따져보기도 전에 이미 몸 안의 세포들이 먼저 꿈틀거리고 있는.

    내 감각 세포들 중에 가장 먼저 꿈틀거린 건 아마도 후각세포였을 것입니다. 바다로 열린 고개를 넘자마자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오는 갯냄새. 정신을 아찔하게 흔들어놓는 비린 그리움의 향기. 내 안의 세포들엔 태생적으로 갯냄새에 열광하는 형질들이 들어 있습니다. 한때 형질전환을 꾀해본 일도 있었지만, 다시 갯냄새에 노출되는 순간 그런 노력이야말로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형질은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몇 세대에 걸쳐서 만들어져 온 유전적 형질일지도 모릅니다. 수월리에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건 내가 바다를 떠나 산골에서 몇 해를 살고 있어도 나는 어쩔 수 없는 갯가 사람이란 것입니다.

    수월리는 통영시 도산면에 있는 작은 포구입니다. 도산면 일주도로를 따라 범골고개를 넘고 다시 낮은 산자락을 몇 굽이 돌아야 수월리에 닿습니다. 수월(水月). 나는 그 이름에도 반했습니다. 물과 달, 또는 물속에 비친 달. 왠지 수월이란 이름에는 스스로 돌아앉은 사람이 지닌 슬픔과 아득한 그리움 같은 것이 배어 있습니다. 수월, 그 이름은 붙잡고 싶지만 붙잡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마음을 다친 여인의 외로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 곤륜산의 옥을 쪼개다가

    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는가

    견우가 한 번 떠나간 후에

    수심에 쌓여 푸른 하늘에 던졌다네

    - 황진이 <반달>



    수월리엔 바다와 마을 사이에 숲이 있습니다. 2월의 수월숲은 직녀의 머리빗 같아서 숲을 지나온 바람은 한 올 한 올 만져질 듯합니다. 거친 겨울바람이래도 수월숲을 지나오면 굼실굼실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서 숲 안쪽에 있는 마을은 따뜻하고 들녘은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습니다.

    수월숲은 수월리에 살던 사람들이 천 년 전에 만든 방풍림입니다. 포구를 가로지르고 있는 숲에는 느티나무와 팽나무들이 자랍니다. 나는 느티나무나 팽나무가 잎사귀를 모두 버린 채 푸른 하늘에 가느다란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때를 좋아합니다. 말하자면 나무들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인데 이때 나무 아래 서서 천천히 올려다보면 무수히 많은 검은 별들이 점점이 빛나고 있는 푸른 하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십만 개의 점을 찍으며 그려낸, 화가 김환기의 그림 같은 하늘입니다. 어쩌면 수월숲에 사는 느티나무나 팽나무들도 나이테와 나이테 사이에 이런 일기 한 구절을 써두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 김환기의 일기



    수월숲 사이로 난 길을 지나면 푸른 들녘이 나옵니다. 수월리의 들녘을 푸른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은 시금치입니다. 수월리 시금치의 잎엔 푸른 바다가 그대로 들앉았습니다. 겨우내 시금치를 키운 것은 햇빛과 바닷바람입니다. 시금치는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야 단맛이 깊어집니다. 시금치가 단맛을 내는 것은 겨우내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잎사귀에 당을 축적하기 때문이라는데, 시금치가 몸에 좋은 것은 아마도 그런 강인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는 까닭인가 봅니다.

    시금치 얘기를 꺼내다 보니 불현듯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시금치된장국 생각이 납니다. 싱싱한 바지락과 푸른 시금치를 넣고 끓인 된장국. 그 달큰했던 맛이 그리워집니다, 흔히 영혼의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을 일러 소울푸드라는 말을 하는데, 시금치된장국도 내겐 그런 소울푸드 중의 하나입니다.

    수월리 시금치밭을 한 바퀴 돌았으면 이제 수월리 뒷산을 한 바퀴 돌아볼 차례입니다. 수월리를 포근하게 감싸 안은 산은 매봉과 봉화산입니다. 수월고개에서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매봉에 닿습니다. 매봉은 해발 281m의 나지막한 봉우리지만 매봉에 서면 멀리 거제도의 첩첩한 산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산들은 먼 바다에서부터 파도처럼 일렁거리며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수월리 들녘을 내려서며 잠시 잔잔한 물결이 되었다가는 다시 크게 일렁거리며 사량도 지리망산을 지나 남해 금산으로 이어집니다.

    매봉에서 수월리를 감싸며 부드럽게 휘어지는 능선을 따라가면 봉화산에 닿습니다. 해발 325m의 봉화산은 옛날 봉수대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곳에 있던 봉수대는 우산봉수입니다. 우산은 봉화산의 옛 이름인데 산등성이의 형세가 소의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산봉수대는 통영 미륵산 봉수대에서 피워 올린 신호를 받아 고성 좌이산 봉수대로 전달하던 곳입니다.

    봉화산의 정상 가까이 있는 너럭바위 전망대에 서면 통영 미륵산과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등변 삼각형처럼 우뚝 솟아오른 미륵산은 산양면 풍화리로 한쪽 줄기를 길게 늘어뜨리며 푸른 바닷속으로 가라앉습니다. 풍화리의 뒤쪽에서 반짝 빛나는 것은 오비도와 곤리도, 추도 같은 섬들이고, 더 멀리서 가물가물 일렁이는 것은 욕지도와 연화도입니다.

    섬은 수월리와 미륵도 사이의 바다 위에도 흩어져 있는데, 둥글넓적 생긴 섬은 말안장 같아서 마장도고 기다랗게 늘어진 두 개의 섬은 뱀섬과 작은뱀섬입니다. 그리고 마치 두 개의 작은 봉우리가 붙을 듯 말 듯 봉긋 솟아 있는 섬은 장구섬인데, 장구섬 가까이 가면 들릴지도 모를 파도의 장단소리가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여행을 하다 보면 그대로 한철 눌러앉고 싶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대로 눌러앉고 싶었으나 눌러앉지 못한 마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그리워지는 마을이 있습니다. 2월의 수월리도 내겐 그런 마을입니다. 어쩌면 수월이라는 그 이름처럼 어느 날 문득 물 속에 뜬 달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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