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8일 (목)
전체메뉴

[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42) 배한봉 시인이 찾은 ‘창원의 집’

옛것, 나를 새롭게 하는 이름

  • 기사입력 : 2013-04-11 01:00:00
  •   
  • 안주인과 여성들이 기거하는 안채. 봄볕이 눈부시다.
    창원의 집 정문.
    곡식을 도정하는 기구인 연자방아.
    농기구전시관.
    바깥마당 연못의 물레방아.
    사랑채 앞 소나무.
    팔각정.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2, 3년도 못 넘길 정도로 자주 강산이 변한다. 새 것을 추종하고, 새로운 것에 열광하고, 변화에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 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바뀌는 능곡지변(陵谷之變) 정도가 아니라 하루아침에 언덕과 골짜기가 도시로 변하고, 도로와 건물로 꽉 차는 시대다.

    변화의 바람을 놓치면 퇴물이 되고,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강박이 우리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혁신을 외치고 최첨단을 외치는 변화와 새로움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자꾸 옛것의 소중함을 잊는다. 낡은 것의 아름다움과 전통이 안고 있는 근원적인 것들을 놓친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어느새 첨단 시대의 내국 디아스포라가 되어 마음을 한 곳에 정주시키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자신을 만나곤 하는 것이다.

    전통과 새로움이 조화를 이룬 ‘창원의 집’ 정자에 앉아 기왓골 햇볕과 묵언대화를 나누다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뒤란 대숲 바람소리가 귀를 청량하게 씻어주는 하오다. 밥 먹고 사는 일로 도시에 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촌놈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철근과 콘크리트와 유리로 이루어진 화려한 건물보다 이런 한옥이나 흙집을 더 좋아하고, 요란한 음악보다는 고요한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정적에 마음 자주 빼앗기는 것은 내 몸속에 조상 대대로 만들어져 대물림해온 그런 유전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창원의 집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에 있는 전통 가옥이다. 19세기 말에 건립된 순흥 안씨 집안 소유의 한옥이었다. 창원이 기계공업공단으로 조성되고 신도시로 건설될 때 사라지는 기존 한옥과 농경문화를 전승 보전하기 위해 옛 한옥 일부를 개축하고 신축 복원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안채와 사랑채, 민속관, 정자, 팔각정, 대문 등 14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1985년 개관했다. 전통혼례를 올리고자 하는 시민에게는 장소와 혼례복을 무료로 제공한다.

    창원의 집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은 향토역사관으로 향하고, 왼쪽은 농기구전시관, 오른쪽은 민속교육관으로 향하는 길이다. 솟을대문 맞은편 담장 안팎으로 자목련과 박태기나무, 철쭉이 붉은 꽃을 피워 봄을 더욱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고택에 왔으니 일단 향토역사관으로 들어가 한옥의 고풍스런 맛을 느껴보자.

    사랑채에 성퇴헌(省退軒)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는 주로 바깥주인이 기거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후학을 양성하는 서당 역할을 하는 곳이니 ‘물러나서 살피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당호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이쯤의 당호를 가진 주인이라면 세속적인 것에서 물러나 두루 세상을 살피고, 인심을 살피고, 학문을 살폈을 것이다. 사랑채 옆 마당 소나무가 고택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사랑채 뒤의 안채는 안방, 대청마루, 건넌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넌방 앞 선반에 얹힌 대소쿠리가 안주인과 여성들의 생활공간임을 말해주고 있다. 안채 뒤쪽에 조그마한 마루가 숨겨진 듯 놓여있는데, 여성들이 이곳에서 남 눈치 보지 않고 편안하게 여름철 뒤란의 시원한 골바람을 쐬었을 것이다.

    안채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고, 서쪽 문으로 나가면 농기구전시관과 만난다. 농경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새끼틀, 탈곡기, 가마니틀, 베틀, 디딜방아, 가마, 농기구, 맷돌 등 4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 기구들을 보다가 문득 양지바른 곳에 시금치나 겨울초 같이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채소를 키우는 조그만 텃밭이 하나 있다면 참 좋은 산교육장이자 아름다운 풍경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관리하시는 분들은 여러모로 바쁘기도 하고 좀 귀찮기도 하겠지만…. 이 텃밭에 호미라도 한 자루 놓아두면 어떨까. 자동차는 평균 3~4년, 휴대폰은 평균 18개월(한국일보 2012.06.12)이 교체주기라 하는데, 호미 옆에 이런 문구 하나 새겨두면 어떨까. “우리 부모님은 호미 한 자루도 대를 이어 사용했습니다.” 스토리텔링이 별 것인가. 다 떨어진 약발도 다시 듣게 하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텃밭 이야기를 하니 고향집 생각이 난다. 안채 옆 남새밭에는 항상 겨울 채소가 파랗게 자라 있었다. 어머니는 그 채소들을 짚으로 덮어 얼지 않게 해서 겨울에도 싱싱한 채소 반찬을 만들어 내오곤 하셨다.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 먹었던 그 겨울 생채 맛을 떠올리자 입안에 금세 침이 고인다.

    장독대에 쌓인 봄볕을 손바닥 가득 느끼며 팔각정 돌계단을 오른다. 팔각정에서 창원의 집 기와지붕을 내려다본다. 기왓골은 아무래도 이끼도 돋고 와송도 피어서 세월의 무게가 쌓였을 때 더 맛있는 풍경이 펼쳐질 터. 아쉽게도 창원의 집 기왓골에서는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세월이 해결할 일. 기와지붕 너머로 펼쳐진 현대식 단독주택들에 비하면 훨씬 정감 깊게 다가온다. 팔각정 뒤편으로 창원역사민속관이 훤히 보인다.

    팔각정을 내려오면 문은 연자방아 쪽으로 열려 있다. 연자방아는 가축의 힘을 이용해 도정하는 기구다. 연자방아 옆 후문 이름은 효경문(孝敬門)이다. 농경시대를 살아오신 부모님을 생각하게 한다. 효와 경,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글자다.

    바깥마당을 휘둘러 솟을대문 오른쪽의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연못 지나 민속교육관 옆 전통놀이마당으로 간다. 널뛰기, 투호 등이 놓여 있다. 어릴 때 고향에서 동네 친구들과 매일 같이 하던 자치기, 구슬치기, 돌치기, 땅따먹기 같은 놀이를 하던 때가 그리워져서 한참 마당 한쪽을 서성거려본다. 아무래도 나는 촌놈이다.

    창원의 집을 나와 창원역사민속관을 둘러보고는 근처 고인돌 보러 간다. 고인돌이 있는 곳이라는 창원의 집 앞 안내판을 보고 왔는데, 현장에는 안내문도 없고, 땅속에 묻힌 채 윗면을 드러내고 있는 화강암 덩어리를 누가 고인돌이라 알아보겠는가.

    창원의 집 정문에서 남쪽으로 골목을 조금 빠져나가면 400살 당산목(보호수 12-4-6-1)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파릇파릇 이파리를 틔우고 있다. 이 나무 아래서 창원퇴촌농악보존회가 주축이 돼 매년 동제를 지낸다. 창원은 변화와 새로움을 급격하게 맞이한 도시다. 1980년 시로 승격하고, 1983년 7월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 개청하면서 경남의 수부도시가 됐다. 창원의 원주민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현대식 단독주택들에 둘러싸인 당산목을 보며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 세상은 늘 변한다. 생겨난 것은 흘러가고 사라진다. 모인 것은 흩어지고, 흩어진 것은 모이는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 삶이다. 화사하게 천지를 뒤덮던 벚꽃들도 그새 푸르게 돋은 잎에 자리를 물려주고 있다. 그래. 오늘 전통과 새로움이 조화를 이룬 창원의 집 기왓골에 앉아 있는 햇볕과 묵언대화를 나눈 것은 맛이 참 쏠쏠한 일이었다.

    진정한 새로움은 근원에서 출발한다. 정권이 바뀐다고 권력의 속성이 바뀌지 않듯, 누가 돈을 벌건 돈의 속성이 바뀌지 않듯 근원을 새롭게 보지 않고서는 새로움이란 없다. 전통은 바로 그 근원을 새롭게 보게 하는 원천이다. 세상 중심을 새롭게 보게 하는 역사의 눈이다. 나는 오늘 나를 새롭게 하는 원천을 보고 온 날이다.

    글·사진= 배한봉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상규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