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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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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46) 유홍준 시인이 찾은 산청 동의보감촌

실존인물 ‘유이태’는 없고 가상인물 ‘류의태’가 버젓이…
세계의학엑스포 앞두고 막바지 작업 한창인 동의보감촌에 소설 속 가공인물 ‘류의태’ 동상·약수터가…
‘류의태’는 설화·민담으로 전해져… 의술로 가난한 이들 위해 헌신했던 진짜 ‘유이태’는 어디에도 없어

  • 기사입력 : 2013-05-0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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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청 동의보감촌에 있는 '신의 류의태 상(神醫 柳義泰 像)'. 류의태는 역사기록 어디에도 없는 소설 속 가상인물이며 조선 숙종 때 실존했던 신의는 유이태이다.
    왕산 중턱에 있는 ‘류의태 약수터’.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힘들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고향은 고향, 내 피와 살과 뼈를 만들어준 곳이 바로 고향임에야 어찌 그리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물도 고향 나물을 먹으면 타지의 것을 먹었을 때와 내 몸이 반응하는 것이 다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머리가 아니라 몸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가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산청사람이고, 그런 느낌, 그런 반응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향 근처에만 와도 벌써부터 내 몸이 알아서 근질근질한다.

    그런데 그 고향에 억울하고 분한 사정이 있다면 어떡할까?

    오월. 문득 나는 고향의 초록이 보고 싶어졌다. 거함산(거창·함양·산청)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날만 새면 바라보던 필봉산과 왕산, 산청에 내린 나는 특리 쪽으로 길을 잡았다. 금서농공단지를 지나 필봉산 쪽으로 가는 길은 어수선했다. 한방엑스포가 얼마 남지 않았고 마지막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동의보감촌엘 처음 가 보았다. 실로 엄청난 규모고 역사였다. 대단했다. 눈을 들어 올려다보니 필봉산 꼭대기가 바로 머리 위에 얹혀있었다. 저만치 발아래에는 경호강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망은 시원했고 공기는 달았다. 멋진 장소였다. 그런데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의학박물관 옆에 적잖은 크기의 동상 하나가 보였는데 아무래도 이건 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명의 빛, 허준(許浚)’ 동상, 소설이나 드라마를 생각해 보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그 소설이나 드라마 속 허준은 어디까지나 꾸며낸 허구(픽션)일 뿐, 허준은 산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러나 좋다. 크게 보면 한방의 대중화를 위한 거고 열악한 지자체의 숙원사업이니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이건 또 뭐야? 진짜로 웃기는 게 있다, ‘신의 류의태 상(神醫 柳義泰 像)’이다. 나도 모르게 이거 진짜 소설 쓰고 있군! 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쪽팔리기도 하고 아이구 이걸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산청은 내 고향인데! 남세스럽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다.

    그 동상들 근처에는 두 개의 시비가 있는데 그것들도 좀 웃겼다. 그 돌에 새겨진 형편없는 시의 수준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저렇게 역사도 진실도 모르고 쓸 수가 있나,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모르면 자료를 찾아보아야 하고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쓰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이런 데에 이상한 글을 한 번 새겨놓으면 정말로 깨부수지도 못하고 골칫덩어리가 된다. 청탁을 하는 사람(기관)도 청탁을 받은 사람도 조심하고 숙고해야 한다. 그래야 두고두고 욕을 안 먹는다. 특히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관에 빌붙어 이상한 짓거리나 하는 자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문제는 류의태다. 류의태에 관해선 설화나 민담만으로 전해질 뿐, 역사의 기록 어디에도 없다. 류의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소설 속 가공인물이다. 하여간 아무리 관광상품화를 노린 전략이라지만 적어도 역사왜곡 수준쯤이 되면 이건 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형왕릉 위 왕산 중턱의 약수터도 마찬가지다. ‘류의태 약수터’라고 명명되어 있는데 얼토당토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편 산음현’에 이 약수터가 유이태와 관련이 있음이 다 나와 있다.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으니 진짜의 심경이 대체 어떠할까? 한방엑스포가 열리고 엄청난 숫자의 방문객이 몰려오면 아마도 진실을 모르는 일반 국민들 대다수는 이 가짜 유이태인 ‘류의태’를 진짜 ‘신의’로 알게 뻔하다. 족보에도 없는 류의태를 2005년 족보에 만들어 올린 진주류씨와 산청군의 행태가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말이다. 일테면 관광을 위해서 가공인물인 류의태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실제인물인 유이태에 관한 충분한 안내문이나 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자, 지금부터 좀 자세하게 유이태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조선 후기 숙종 때 사람인 유이태는 두 가지 이름을 썼다. 가문, 족보, 문집, 효행장, 조선왕조실록, 의약동참선생안 등에는 유이태(劉以泰), <마진편> <실험단방> <인서문견록>등의 의서에는 유이태(劉爾泰)로 사용하였다. 호(號) 또한 3개로 알려져 있는데 신연당(新淵堂)은 의술을 펼쳤던 산청군 생초면 신연마을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고, 또 하나인 원학산인(猿鶴山人)은 스스로 지은 호로서 수승대가 있는 거창군 위천면의 지명(猿鶴洞)에서 따온 것이다. 가문, 인척, 친구, 지인과 향리의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 사용하였다 한다. 의서인 저서 <마진편>에도 이 원학산인을 사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인서(麟西)는, 저서 <실험단방>과 <인서문견록>에 사용한 호(號)이다.

    유이태는 거창유씨(居昌劉氏)로 1652년(효종 3년, 임진년)에 태어나 1715년(숙종 41년, 을미년)에 별세했다. 거창군 위천면 사마리가 태어난 곳이고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가 거주, 활동한 곳이다. 관직은 숙종 어의(御醫)와 경기도 안산 군수를 지냈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 종1품)의 품계를 받았다.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 산 35-1번지에 그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요즘에도 더러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는다.

    유이태의 홍역전문치료서인 <마진편(麻疹篇>(목판본)은 숙종 시대에 해마다 소아병(마진)으로 많은 어린 목숨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본 후 개탄하여 그 자신이 의원으로서 40여년 동안의 경험담을 담아 저술한 의서이다. 종합의서인 <실험단방(實驗單方)>(필사본)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余觀人之一生無病者盖鮮矣然使病者能知其調治之方則必不至損傷之患可不愼歟余利 平日雜病之經驗所得聞之單方隨錄於一冊以備來後救療之方雖非醫家全書之祥 亦陽暮看下澣 麟西 劉爾泰 내가 평상시에 잡병에 대해서 경험한 것과 얻어들은 단방을 수시로 기록한 책으로 갖추어서 뒷날의 구명 치료의 방도로 하고자 하니 비록 의가전서와 같이 상세하지는 않으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 날로 쓰이는 일에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될까 한다. 인서 유이태’ 또한 치료서인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필사본)의 원본은 일본 행우서옥(杏雨書屋) (일본대판시 전천구 13本町 2-17-85)에 소장되어 있다. 일제시대 한 일본인 의사가 <인서문견록>을 수집하여 일본에 가져갔고 죽기 전 행우서옥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현재 <인서문견록>은 해외영인본(海外影印本)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홍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유이태의 <마진편> 역시 그러한 서적의 일종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특히 숙종 후반 홍역의 발생이 급증하면서 천연두보다는 오히려 홍역이 더욱 문제가 될 정도였는데 유이태의 <마진편>은 수많은 생명을 구한 귀중한 의서였다. 어쨌거나 유이태에 관한 자료 수집과 연구는 이미 공신력을 가진 여러 사람에 의해 상당한 정도의 진척과 수준 높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의를 제기할 수조차 없다.

    여기서 나는 또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의문에 빠진다. 그렇다면 산청군은 왜 진짜 유이태를 두고 가짜 류의태를 내세워 상품화를 하려는 것인가? 여러 차례 중앙언론이나 지상에서 의문을 제기했었고, 관련 연구를 한 학자들이 바로잡기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 역사를 비틀어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모름지기 관료란 역사적 진실에 의거해 사업을 진행하여야 하고, 설사 잘 모르고 한 실수가 있어 지적을 받았다면 속히 수정하여 오류나 오점, 억울함이 없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을 무시하면 이른바 독선이고 독단이고 전횡이다. 두고두고 욕을 들어먹게 되는 것이고, 자신들이 발붙이고 사는 지역에 대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구형왕릉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류의태 약수터’엘 올라가 볼까 말까 몇번이나 망설였다. 이미 여러 번 거길 가 보았기 때문이었다. 왕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그 약수 한 모금을 떠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이태? 류의태? 역사는 자꾸 왜곡하면 어지간히 잘 아는 사람들도 나중엔 헷갈려하게 되고 가짜에 세뇌가 된다. 어쨌거나, 그 옛날 약을 달이던 이 약수는 여전히 등산객의 목을 축여 갈증을 풀어줄 테니 제 기능을 여전히 다 하고 있는 셈이다.

    구형왕릉을 나와 나는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로 향했다. 유이태의 묘를 한번 찾아가 볼 작정이었다. 들판에서 일하는 어른들께 물어물어 찾아간 골짜기, 유이태 선생 묘소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구절양장, 형편이 없었다. 표지 하나 없는 좁디좁은 산골짜기 길로 억지로 억지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고 감사한 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여전히 그 지역에 사는 분들이 유이태 선생의 묘를 아주 정확히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것이 놀라웠다. 그런데 또 드는 의문 한 가지. 왜 이곳 사람들은 이 ‘가짜 류의태 관광상품화’에 관해 함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민담이나 설화가 아니라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건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역사는 오로지 기록만으로 증명된다. 나 역시 여러 자료와 기술들에 의지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이라도 산청군은 상품으로서의 류의태와 역사 기록으로서의 유이태를 정확히 밝혀 국민들에게 그 진위를 밝혀주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혈세로 녹을 먹는 관리의 역할이고 소임이다. 그리고 족보에도 없던 류의태를 족보에 올리는 진주류씨들의 행위 역시 문제가 됨은 말할 것도 없다.

    관광상품으로서의 류의태를 어쩌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속 가공인물을 가져온 것도 크게 문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 나 역시 한방엑스포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염원하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한방엑스포의 성공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소중하고 중요한 게 있다면 그건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산청군은 한방단지 내에 가공인물 류의태와 역사 속 진실의 인물 유이태를 분명하게 가려서 안내판과 공간을 조속히 마련하여야 한다.

    필봉산 밑 한방단지에서 유이태 선생의 묘소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몇㎞밖에 안 된다. 만약에 혼령이 있다면 당신의 머리맡에서 벌어지는 이 희한한 작태에 관해 유이태 선생은 무어라고 말할까? 평생을 의술로써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간 분을 너무 서운하게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글·사진=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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