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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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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47) 송창우 시인이 찾은 남해 노도

유배의 한 서린 ‘절망의 섬’
서포의 혼 깃든 ‘문학의 땅’

  • 기사입력 : 2013-05-1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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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련마을에서 본 노도.
    노도마을. 서포의 유배지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큰골에 있다.
    서포가 살았던 초막. 마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서포가 생을 마친 후 몇 달간 묻혀 있었던 허묘.
     


    노도로 가는 길은 멀다. 노도에 들자면 우선 남해도로 가야 하고, 앵강만 입구의 벽련 포구에서 다시 배를 타야 한다. 뱃길이라야 고작 10분이지만 섬이란 늘 실제 거리보다 멀리 있다. 10분 거리인데도 10년 동안 가보지 못하는 곳. 섬이란 그런 곳이다.

    몇 달을 망설이다 작정을 하고 나섰지만 노도로 가는 길은 여전히 흔들거린다. 창선대교를 지날 땐 죽방렴에 걸리는 멸치처럼 자주 차를 세웠다 갔다. 봄날, 혼자 섬으로 가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 한나절의 여행길이 이럴진대 천리 유배길,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을 두고 죄인의 몸이 되어 가던 서포의 길은 오죽 멀고 쓸쓸했으랴! 천리길 첩첩 눈물로 아롱지던 길 하나가 불현듯 내 안에도 스며들어서 내 가는 길도 몹시 구불구불하다.

    앵강만을 끼고 상주 쪽으로 가다 보면 휘어진 길가에 벽련마을 표지가 있다. 벽련마을은 산비탈 아래 있는데,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서 보면 푸른 연꽃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잘 어울린다. 금산과 설흘산이 둥글게 둘러싸고, 설흘산 끝자락 가천 마을 너머로 여수 돌산이 둘러있는 바다. 벽련마을에서 바라보는 앵강만은 그대로 푸른 연꽃이다. 천년만년 피어도 지지 않는 꽃. 그 고즈넉한 연꽃바다 남쪽 끝에 삿갓섬 노도가 있다. 저만치 노도의 산자락에 앉은 지붕들이 조가비처럼 반짝인다.

    노도로 가려면 벽련포구에서 배를 타야 하는데, 정기도선이 없는 탓에 낚싯배를 대절해야 한다. 보통 노도까지 왕복에 1만 원이라는데 이는 일행이 두 사람 이상일 때 그렇다. 나처럼 혼자 노도에 들자면 두 사람 몫인 2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그 2만 원에는 섬에 절대로 나를 버려두지 않겠다는 선장의 약속이 들어 있다. 그런 까닭에 뱃삯은 돌아올 때 벽련부두에서 치른다. 만약 노도에 든 사람이 영영 나오지 않는다면 어쩌나. 노도에 나를 내려주고는 나오고 싶을 때 전화 한 통 하라며 두말없이 떠나가는 선장님을 보니 여태 그런 사람은 없었나 보다.

    푸른 적막. 내게 노도의 첫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너무 적막해서 어쩌면 이 섬에 혼자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살짝 엄습하는 곳. 썰물 때라 바다도 자고 바람도 잤다. 조그마한 선창에는 몇 척의 배가 묶여 있고, 산비탈엔 스무 채 남짓 낡은 지붕들이 있었지만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가끔 뒷산 수풀에서 적막한 하늘을 울리며 산비둘기만이 국-국- 울 뿐.

    선창가를 돌아 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늙은 팽나무 한 그루가 있고, 1988년에 세운 ‘서포김만중선생유허비’가 있다. 서포에게 노도는 세 번째 유배지이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했던 곳이다. 숙종 15년(1689), 후궁 장씨의 소생인 ‘균’의 원자책봉을 반대하던 서인들이 모두 축출되는 기사환국이 있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서포는 윤3월 7일 천극절도(棘絶島)의 명을 받고 이 머나먼 섬에 유배되어 3년 54일을 살았다.

    서포가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유배지는 노도마을에서도 다시 한참 떨어진 큰골 골짜기에 있는데, 마을로 난 언덕배기 길을 올라 상주 앞바다를 보며 걸어야 한다. 햇살은 이미 여름인 듯 따가운데 길가에는 아직 피고 있는 동백꽃들이 있다. 서포가 지친 몸을 이끌고 큰골로 가던 때도 윤삼월 봄이었으니 아마도 동백꽃을 보았으리라. 툭툭 모가지를 꺾으며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 소리도 들었으리라.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모르는 유배자의 길에 떨어지는 동백꽃 소리란 얼마나 서늘했을까.

    동백꽃 떨어지고 그 소리에 놀란 작은 봄꽃들이 줄줄이 피어 있는 길을 따라 한 20여 분쯤 걸어드니 갈림길이 나온다. 오르막길은 서포가 생을 마친 후 몇 달간 묻혀 있었던 허묘로 가는 길이고 내리막길은 서포가 살았던 초막으로 가는 길이다. 삶의 자리는 언제나 낮은 곳에 있고 죽음의 자리는 늘 높은 곳에 있다.

    허묘로 오르는 길은 돌계단 길인데 꽤 비탈져 있다. 한껏 물오른 신록 사이로 난 새하얀 화강암 계단이 썩 어울리지는 않다. 아무튼 계단이어서 습관적으로 한 발 한 발 셈하며 올랐더니 233계단이 끝나는 곳에 허묘 자리를 알리는 작은 표석이 있다.

    서포가 독한 외로움과 풍토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건 숙종 18년(1692) 4월 30일, 쉰여섯 살의 저무는 봄날이었는데 그 뒤로 몇 달간 여기에 누워있었다. 그해 서포의 주검이 잠시 누워 있던 자리엔 묘하게도 잡목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300해가 지나도록 텅 비어 있는 자리. 비어 있는 곳의 쓸쓸함이란 그것이 집이든 무덤이든 같다.

    초막은 내리막길 끝 동백나무 그늘에 있다. 몇 년 전 유배지 자리를 고증해서 새로 지은 집이라 세월의 흔적이 깃들지는 않았지만,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요만은 참으로 깊고 깊다. 그리고 마루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이곳이 절망의 땅이었던 것을 잠시 잊어버리게 한다. 금산의 한쪽 끝자락 양아리의 산들은 봉긋 솟았고 아래로는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있다. 아마도 해무가 끼는 새벽엔 선경에 비길 만한 풍경이어서, 동정호 용왕의 딸 백능파가 양소유를 만나러 물살을 헤치고 올 듯도 싶다.

    다만 아쉬운 것은 울타리에 심어진 홍가시나무들인데 홍가시나무는 이름과 달리 가시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록활엽의 정원수다. 아마도 가시 울타리를 치고 살아야 했던 천극안치의 의미를 살려 홍가시나무를 심은 듯한데, 이름만 가시인 나무를 천 그루를 심은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왕에 유배지를 꾸미고자 했다면 우리 옛 방식대로 탱자나무를 심었으면 좋았을 것을. 말 나온 김에 초막 앞, 한 글자도 보이지 않는 채 녹슬어가는 싸구려 안내판도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다.

    서포가 <구운몽>을 집필한 장소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서포연보>가 발굴되기 전에는 이곳 노도에서 쓰였으리라 짐작하는 학자들이 많았고, 노도 입구에 있는 ‘서포김만중선생유허비’에도 그렇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함경도 선천 유배 때에 쓴 것이라는 설이 더 유력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노도에 깃든 서포의 문학혼이 퇴색될 리 있으랴. 그는 여기에서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며 당대의 정치를 풍자한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썼고, 유배 중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윤부인행장>을 썼고, 습기와 벌레와 풍토병과 싸우며 <서포만필 하권>과 <주어찬요>를 남겼다.

    그 밖에도 서포는 남해에서 여러 편의 시문을 남기는데, 그중에는 유배 온 첫해 가을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절절한 그리움으로 쓴 <사친시>가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자고 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 이미 흥건하다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도로 던져 버렸던가

    문집에서 남해에서 지은 시는 반드시 빼버려야 하리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초막집 방문을 열고 텅 빈 방안에 들어가 한참을 앉아 본다. 한참을 앉아 나도 어머니 생각을 해 본다. 아무것도 없는 방. 쓸쓸한 방. 이 방안 어디쯤 아무도 그립지 않는 내 삶을, 내 너절한 시들을 유배시켜놓고 싶어졌다. 창가에 몰래 시집 한 권 두고 왔다. 오래오래 이 집에서 외로움과 살아라.


    글·사진=송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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