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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01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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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60) 김참 시인의 김해 대동면 산해정 산책

귓가에 들려온다, 남명의 글소리

  • 기사입력 : 2013-08-2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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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해정과 하늘. 낙동강 건너 부산이 보인다.

    산해정 정문 진덕문과 배롱나무.
    산해정 내부 신산서원.

    김참 시인


    무더위가 한풀 꺾인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산해정을 찾아간다. 대동 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면서 만나는 왕복 2차선의 좁은 길, 나는 이 길을 얼마나 자주 다녔던가? 외동에 살던 십 년 전쯤에 자전거를 타고 나는 이 길을 종종 지나다녔다. 왼쪽으로 보현사 팻말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그 시절, 겨울 어느 날 보현사로 올라가는 산길에서 만났던 고라니가 문득 생각난다. 나를 보고 그리 놀라지 않던 고라니,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 인가가 가까운 곳까지 내려왔을 고라니, 지금도 초록이 무성한 신어산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왕복 1차로의 좁은 길 옆에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고 길을 따라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길 오른편으로 낙동강이 보인다. 낙동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파밭이 있고 산딸기를 심어 놓은 곳을 지나가면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지나가면 나타나는 낙동강 지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잎들을 밀어올리고 있다. 나무 그늘에 잠시 서서 강을 바라본다. 강은 천천히 흘러가고 인적에 놀란 작은 물고기들이 파문을 만들며 강 속으로 달아난다.

    주동마을 쪽으로 차를 몰고 올라간다. 산해정과 예안리 고분의 방향을 알리는 갈색 표지판 앞에서 나는 산해정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마을 입구에 걸려 있고 도로 건설 때문에 마을이 약간 어수선한 느낌이 든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는 마을을 가르며 흐르는 개울 옆을 지나다녔는데, 오늘은 개울을 조금 지나서 있는 비탈진 길을 따라간다. 개울 저편으로 집들과 나무들과 산 위에 떠 있는 구름이 보인다. 참 평화로워 보인다.

    산해정, 올 들어 세 번째 방문이지만 여전히 인적이 드물다. 이 길을 지나가며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커다란 바위에 담쟁이들이 가득하다. 마을 경로당 앞에 빨간 고추가 말라가고 있다. 차에서 내려 산해정 쪽으로 걸어간다. 몇 채의 집을 지나가면 특이한 분위기의 사원인 반냐라마와 사원에 딸린 작은 건물들이 보인다. 잔디가 자라는 반냐라마의 너른 뜰 위로 잠자리가 날아다닌다. 길 왼편은 사원이고 오른편엔 찻집처럼 보이는 특이한 분위기의 단층건물들이 있다. 이 사원과 주변에 있는 건물의 분위기가 특이해서인지 이곳은 보통의 절집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주황색 가사를 걸친 젊은 스님 몇 분이 인부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작은 밭과 식당을 지나면 산해정이 나타난다. 산해정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오늘도 문이 굳게 닫혀 있지만 앞뜰 배롱나무에 꽃이 만개하였다. 산해정은 조선시대의 석학인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18년 동안 후학을 가르친 곳이다. 남명 선생의 고향은 합천이지만 22세에 김해 예안리 남평 조씨와 혼인하고 서른 살에 처가가 있는 지금의 주동마을에 정착하였다. 그해에 남명 선생은 산해정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그의 학문은 처가가 있는 이곳에서 대부분 완성되었다고 한다.

    남명 선생은 성리학에 통달하였고 인품이 뛰어났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올 것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거절했다. 그는 실천성리학의 대가로 후세까지 이름을 널리 떨쳤다. 남명은 이론을 체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학자의 바른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다. 남명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의병장들이 많이 나왔던 것도 그의 이와 같은 학문적 태도와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의령의 곽재우를 비롯하여 합천의 정인홍, 고령의 김면 등이 남명 문하다. 뿐만 아니라 왜군이 침략했을 때 김해읍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네 명의 충신도 남명의 학풍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남향의 산해정은 발아래로 흐르는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여름의 더운 공기가 산해정 주변을 감싸고 흐른다. 숲에서 풀벌레들이 울고 새들이 지저귀고 벌들이 붕붕거리며 공중을 날아다닌다. 산해정은 외진 곳에 있어서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다. 근처 텃밭에서 농부 내외가 밭일을 하고 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별다른 소리를 만들지 않는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산해정 정문인 진덕문 앞 표지판에 쓴 산해정의 약사(略史)를 읽어본다.

    산해정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18년 동안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539년(선조 21년)에 지역주민의 요청으로 김해부사 양사준이 정자 동쪽에 서원으로 착공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다. 1609년(광해군 1년)에 안희, 허경윤 등이 완공하여 나라에서 신산서원의 이름을 받았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지금의 산해정은 1815년(순조 20년)에 송윤중 등이 다시 세운 것이다.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은 없고 가르치는 공간만으로 된 서원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에 추녀 끝을 올린 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앞부분의 기둥을 받치는 높은 주춧돌과 잔가지를 엮어 진흙을 바른 천장의 제작법이 특징이다.

    까치발을 하고 산해정 내부의 건물을 들여다본다. 고요하다. 남명 선생이 별세한 뒤에 제자들이 정자 동쪽에 세웠다는 신산서원이 보이고 오른쪽에 두 채의 작은 기와집이 보인다. 서원 뒤에는 돛대산이 있다. 돛대산의 다른 이름은 조차산이다. 남명 선생은 어린 아들 차(次)가 죽자 돛대산에 묻었다. 그리하여 이 산의 이름은 조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칡덩굴과 잡목으로 덮인 산해정 담장을 따라 산해정을 한바퀴 돌아본다. 고요하다. 잡목과 칡덩굴 가득한 산해정의 담 밖에서 바라본 산해정 내부는 고인이 된 최하림 시인의 시 한 편을 떠올리게 한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예리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물어내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집 안은 잡목숲을 따라오는/ 파동 때문에 금세라도 지붕이 무너져내릴 듯/ 했습니다 그 집의 역사가 유지되는 것은/ 순전히 구멍을 뚫어대는 동박새라든가/ 딱따구리 생쥐의 역할인 듯 했습니다/ 한낮이 되어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타나 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파동은/ 조금치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건만/ 아무도 뒤란을 돌아 문을 따주러 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더욱 깊은 파동 속으로 들어가 움쭉도/ 않았습니다 해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질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잡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최하림, ‘나무가 자라는 집’



    그늘에 자리를 깔고 우리는 잠시 더위를 식힌다. 노랑나비 한 마리도 산해정 담장 기와에 잠시 앉아 쉰다. 산해정 왼편 비포장도로에서 승용차 한 대가 내려온다. 더위가 물러가고 단풍 드는 가을이 오면 우리는 다시 이곳을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자리를 접고 떠날 채비를 한다. 해가 질 무렵이면 산해정 작은 방에서 책을 읽던 남명 선생이 마당으로 걸어나와 석양에 물드는 낙동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글·사진= 김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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