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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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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73) 박서영 시인이 찾은 함안 여산 팔경마을

따뜻한 마을 풍경에선 고향 내음이 나네요

  • 기사입력 : 2013-11-2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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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산 팔경마을 여주 이씨 재실.
    담 위에 떨어진 감과 곶감 말리는 모습.
    효자목으로 가는 길.

    함안 여산 팔경마을의 돌담길.



    은둔을 꿈꾼다면 시골에서는 살 수 없어요. 내가 사는 5층짜리 빌라가 차라리 더 나를 은둔자로 만들어 주지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에 살아요. 우편함에 쌓이는 우편물을 엿보지 않는다면 누군지 알 수 없는. 얼마 전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주머니는 그래도 눈인사를 하고 지내지요. 이렇게 날씨가 쌀쌀하고 추워질 땐 따뜻한 소통이 그리워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더 이상 설렘도 없고 궁금함도 없으면 권태로움이 남잖아요. 설렘이나 궁금함은 소통의 입구 같은 거여서 심장이 떨리기도 하지만, 나는 오래 만난 사람에게서 풍기는 ‘깊이’를 더 사랑해요. 함께 보낸 순간들이 내 몸 어딘가에 박혀 빛나고 있으니 쉽게 떠나지도, 떠나보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이 도시를 연인처럼 껴안고 살아가야 할 테지요.

    11월, 12월이 지나면 13월이 오나요? 탁상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햇살이 내리는 작은 마을을 산책하고 싶어졌어요. 따뜻한 소통이 흐르는 마을. 그곳에 신비로운 비밀이나 이야기가 없어도 좋아요. 이미 내 심장에 늦가을의 불이 번져 있었으므로 걸을 수 있는 들판과 옹기종기 모인 집들과 저녁 연기 피어오르는 풍경이면 되지요. 그곳은 어머니의 몸처럼 나를 받아줄 것이 분명했어요. 문득, 길에 뒹구는 낙엽의 구멍처럼 허전해지기도 하는 계절이니까.

    내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의 냄새를 간직한 곳. 함안 여산 팔경마을은 그런 곳이에요. 어머니라는 품을 벗어나자마자 우리의 영혼은 상처 입어요. 그런데도 나는 왜 늘 떠나고 싶어 하고, 아직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생의 열정과 열망이 단풍처럼 물들고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괜스레 멜랑콜리해져서는 애수에 젖곤 하지요. 그러나 순간의 감정이 아무리 야생의 본능을 일깨운다고 해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꽉 막혀버리는 게 목구멍이고 눈구멍 아니던가요. 지속가능한 감정과 연대의 필요성을 느끼며 여산 팔경마을을 천천히 걸어봤어요.

    여산 팔경마을은 함안 여항면 내곡마을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에요. 몇 해 전 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여산 팔경마을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대요. 이 마을의 역사는 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주 이씨가 광려산 아래 터를 잡고 살면서 두곡마을로 불리다가 경술국치 이후 현재의 ‘여항면 내곡리’로 명명되었대요. 우리의 시골도 많이 변하고 있어요. 다만 마을 앞에 흐르는 작은 개울처럼 세월이 조금 늦게 흐르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고 시골마을을 한물 간 사내처럼 생각해선 곤란해요. 비록 번쩍번쩍 화려한 말로 사람을 현혹하진 않지만, 대신 깊이 있는 미소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거든요. 마을 한가운데 여주 이씨 재실은 고가의 품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오래 알고 지낸 사내 같아요. 이 고가는 104년 정도 된 것으로 내곡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라고 하네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잠시 앉았다가 마을을 걸어봤어요. 어르신들이 대나무 간짓대를 이용해 감을 똑똑 따고 계시네요. “축제도 끝났는데 뭣 하러 왔소? 뭐 볼 게 있다고!”, “마을을 소개하고 싶어서요. 참 평화롭고 따뜻한 마을 같아요.”, “산도 있고 개울도 있고, 하루 종일 햇살이 비치는 평지에 있으니 좋은 땅이지.” 감을 따다 말고 한마디, 또 한마디. 어르신이 자꾸 말을 시키네요. 지난 10월에 ‘함안곶감잔치 한마당’이 열렸대요. 곶감 많이 깎기, 곶감 모양내기, 감 지고 달리기 등의 경연과 감 깎기, 감 건조까지 곶감 만들기의 전 과정을 체험해 볼 수 있었다네요. 곶감을 이용해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감 모둠떡과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골밥상도 해 주었대요. 여주 이씨 재실을 한 바퀴 돌아보다가 돌에 새겨진 廬山八景(여산팔경)의 글귀를 읽어보았어요. 여산 팔경마을의 여덟 개의 경치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 廬山八景(여산팔경)-

    洞門平磐(동문평반) 마을 입구의 평평한 바위

    屛表鵑花(병표견화) 절벽에 피어난 진달래

    晩林啼鳥(만림제조) 해 질 무렵 우는 새

    鵂崖飛瀑(휴애비폭) 수리부엉이 앉은 벼랑서 떨어지는 폭포

    冑峯霽月(주봉제월) 비 그친 투구봉에 뜬 달

    童山晩楓(동산만풍) 동산의 늦가을 단풍나무

    東嶺孤松(동령고송) 동쪽 산봉우리의 외로운 소나무

    西澗疎篁(서간소황) 서쪽 계곡의 대나무 숲



    돌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니, 이 마을 사람들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풍경을 아름다움으로 삼고 살아갔군요. 여산팔경 체험관 옆에 자리하고 있는 여주 이씨 재실에서는 한자풀이 및 고사성어 등을 배울 수 있는 서당 체험도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마을을 돌다가 곶감 만드는 곳으로 들어가 봤어요. 감 깎는 기계가 있지만 손으로 하나하나 감을 깎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이 주홍빛으로 익어가고 있어요. 완전히 마르기 전 속살이 몰캉하게 살아 있을 때의 곶감 맛은 사랑을 고백하기 전의 설렘 같아요. 어느 날 들여다본 당신의 눈동자 같고 마음 같아요.

    이희찬(52) 씨는 여산 팔경마을의 추진위원장을 지내셨는데, 젊은 사람이 너무 없어서 아쉽다고 하시네요. 그러다가 나가면서 꼭 논 한가운데 서 있는 ‘효자목’을 보고 가라고 하십니다. 여주 이씨 가문 중의 어느 아들이 아픈 노모를 위해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그 이후 어머니의 병도 낫고, 장수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대요. 예전엔 한국의 아름다운 농촌 마을 100선에도 들었다고 자랑을 하십니다. 그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아저씨는 광려산 투구봉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해 줍니다. 옛날 임금이 이 산을 넘을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자 놀라서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바위가 되어 투구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군요. 마을 계곡 뒤편의 폐금광은 금굴탐사 체험장으로 단장하여 굴속을 탐험하면서 금맥의 모양도 살펴보고 음식물을 저장하는 천연냉장고의 역할도 하고 있대요. 시골에서는 이야기가 하염없이 풀려 나와요. 하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전설 없는 마을이 어디 있겠는지요.

    당신과 당신과 당신의 가을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느티나무 고목처럼 모든 잎을 떨구고 사방으로 그리움을 뻗고 있으신가요? 여산 팔경마을은 600살이나 먹은 느티나무 고목 속의 마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변하지 않는 집 같고 방 같은 곳이지요. 나는 마치 그 나무를 찾아든 다람쥐처럼 잠시 웅크리고 있었어요. 느티나무 구멍에 뭔가 비밀을 숨긴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더군요.

    내 마음의 팔경은 아직도 묵은 김치를 택배로 보내주는 엄마가 그 하나요. 소설을 쓴답시고 카페를 전전하는 딸이 그 하나요. 애틋하지만 말할 수 없는 당신이 또 그 하나이니, 나머지는 알아서들 채워주시던가요. 사랑의 공동체. 문득 이 말이 주는 따뜻함이 발갛게 물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녁에 소주 한잔하고 싶다고 했더니, 당신은 장흥에 출장 왔으니 장흥으로 오라네요. 전화를 끊자마자 다른 이에게서 함께 저녁 먹자는 문자가 와서 그날 저녁이 영 섭섭하지만은 않았어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당신과, 어느 날 함께 나와 밥을 먹어준 당신을 이 늦은 가을 ‘나의 아름다운 절경(絶景)’으로 남겨둘까 해요.

    글·사진= 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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