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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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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86) 김승강 시인이 찾은 진해

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순수’의 도시

  • 기사입력 : 2014-02-25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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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사 골목


    탑산에서 내려다본 중원로터리

    일년계단과 모노레일

    문화공간 흑백


    북원로터리 이충무공 동상



    옆길로 돌아갈까 하다가

    무심코 네 뒤를 밟고 말았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받쳐 입고

    연뿌리 같은 종아리를 드러낸 채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걷고 있는 너는

    네 발목이 이쁜 걸 아니,

    적산가옥 늙은 백목련

    담 밖으로 흰 꽃잎 툭툭 떨굴 때

    모르는 네 발목이 너무 슬퍼서

    네 뒤를 밟으며

    나는 또 울었다

    - 김승강의 ‘미행’



    얼마 전에 진해의 ‘문화공간:흑백’이 포함되어 있는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다. 사실 그 반가움에는 내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근대문화유산연구보존회’가 발족하는 등 근대문화유산이 근래에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을 알고 반가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근대를 스스로 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근대라는 단어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고 있다. 진해는 일본이 러일전쟁(1904~1905) 승리 후 본격적인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군항도시로 계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 일제가 남기고 간 흔적들이 많이 지워지고 사라지면서 기억도 희미해졌지만, 아직도 완전히 지워지거나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반가워한 것은 그 흔적과 기억은 완전히 지울 수 없고 지워서도 안 된다는 내 생각이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에서다.

    근대문화유산으로는 적산가옥이 대표적일 것이다. 적산가옥은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짓고 살다 해방 후 남겨놓고 떠난 집을 말한다. 대부분 재건축되고 개조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진해 곳곳에는 적산가옥이 많다. 적산가옥은 당시의 관공서뿐만 아니라 일반주택도 포함될 터인데, 덕산, 자은동, 경화동과 시내 일대에 일반주택이 많이 편재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은 꽤 오랫동안 적산가옥에서 살았다. 내부는 많이 개조를 했지만 외형은 당시 지어진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내외형적으로 완전히 개조하기가 어려운 게, 단독주택이 아니라 여러 가구가 일자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집을 ‘관사’라고 했는데, 우편주소에 ‘관사 00호’라고 적으면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적산가옥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적산가옥에서 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그러한 분위기가 좋았다. 군항도시에 산 사람으로서의 운명이라고 할까.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과 상처를 떠나서 이미 내 몸에 체득되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나는 그러한 괴리감 때문에 좀 과장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런 혼란을 치유받는 것 같아 반가운 것이다.

    우리 집은 일본이 도시를 계획할 당시의 관점으로 보자면 시외의 변두리 지역의 공동주택형 적산가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 한 친구는 시내에 있는 단독주택형 적산가옥에 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예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현대식 건물을 앉혔지만 그 집은 2층이면서 규모도 우리 집은 비교가 안 되었는데, 그 규모로 보아 당시 관공서로 쓰였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집에 한 번씩 놀러가고 놀다 늦어지면 자고 오고 해서 그 집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놀러 갈 때마다 그 깊고 내밀한 분위기는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색은 흑도 아니요 백도 아니요 흑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은 논리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흑백이라는 단색은 없으니까. 그러나 순수를 생각할 때 색채의 양 극단인 검정색과 흰색 단색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색채의 양 극단 흑과 백이 같이할 때 흑은 백을, 백은 흑을 돋보이게 하면서 최선의 순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어둠은 빛을 통해, 빛은 어둠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이치와 같다. 해가 떠야 그림자가 생기듯이 말이다. 이는 구름으로써 달을 그리는, 다시 말해, 타자를 통해 내가 드러나는, 또는 나를 통해 타자를 드러내는 동양화의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의 이치에 닿아 있겠다.

    이 세상의 모든 대비는 흑과 백으로 대표될 것이다. 바둑알에서부터 ‘흑묘(黑猫)/백묘(白猫)’가 그렇고 흑백논리가 그렇다. 대비(contrast)는 다른 것과 극명하게 구분된다는 것이고 극명하게 구분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적산가옥을 색으로 쳐서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다. 그 가옥의 미로와 같은 내부 세계가 갖고 있는 은밀함과 내밀함 때문이었다. 저 시에서 적산가옥 앞마당 모서리에는 백목련 나무가 있다. 그 백목련 나무는 아마 집을 지을 당시에 심었을 것이므로 목련나무로서는 매우 늙었다고 할 수 있는 고목일 것이다. 적산가옥과 백목련이라는 흑백의 대비를 통해 나는 순수를 노래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근에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운동 삼아 오르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진해사람들은 탑산을 오른 기억이 까마득할 것이다. 그건 떡집 아들이 떡을 잘 먹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매주 일요일마다 오르는 안민고개를 오르고 내려와 오랜만에 탑산을 올랐다. 그동안 탑산도 많이 변해 있었다. 전에 없던 모노레일 궤도가 ‘일년계단’ 왼쪽으로 나란히 올라갔다. 멈춰 서있는 모노레일을 보니 일 년에 단 두 주를 위해 거기 서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일년계단’도 늦은 일요일 오전이었지만 아무도 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300계단 조금 못 가서 요즘 유행하는 ‘숲속나들이길’이 나 있었는데, 진해 중앙성당, 진해 중앙시장 쪽으로 이어지는 방향은 목재데크가 깔려 있었다.

    탑산 꼭대기 9층에 오르면 진해시가지를 360도로 조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진해시가지에서도 탑산을 360도 방향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저 아래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진해시가지는 이른바 ‘방사선 거리’의 중심인 중원로터리의 분수대 시계탑과 거북선 모형이 철거돼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 이전과 크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중원로터리는 분수대 시계탑과 거북선 모형을 철거하고 잔디광장을 조성했다.

    방사선 거리 조성 당시 중원로터리 중앙에는 큰 팽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고 한다. 1960년 팽나무가 수령을 다하면서 다른 팽나무를 이식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그러다 1967년에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분수대 시계탑과 거북선 모형을 제작하여 배치했다고 한다. 나는 일제가 방사선 거리를 계획하면서 그 중심부를 빙 둘러 근대식 건물을 축조하고 그 중심에 어떤 상징물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 20년대 사진을 보니 그 전부터 있던 팽나무가 중앙에 그대로 있어 의아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북원로터리 중앙에 이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동상 안내문에는 이충무공 동상은 1952년에 세워졌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었다. 궁금증을 풀려고 몇 군데 알아봤지만 명확하게 답을 하는 데는 없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이순신 동상보다 진해 북원로터리의 이순신 동상을 더 좋아한다. 아마 어릴 때부터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의 동상이 만화의 캐릭터처럼 가공적인 느낌을 준다면 진해 동상은 로뎅의 ‘칼레의 시민’ 조각 양식을 닮아 인간적 고뇌가 묻어나는 예술작품의 품격을 가졌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진해 이충무공 동상은 마치 한 자루의 타고 있는 촛불 같다. 오늘도 이충무공은 시공을 초월해 자신을 희생하여 주위를 밝히는 한 자루 촛불로 서서 멀리 진해만을 지켜보고 있다. 조국을 위한 ‘일편단심’과 잘 어울린다 하겠다.

    봄이 오고 있다. 봄이면 진해는 벚꽃 세상으로 변한다. 벚꽃이 피면 진해 시가지의 적산가옥들은 새롭게 생기가 돌까.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남의 나라 땅 진해에 건설한 방사선 거리의 북원로터리에 이충무공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이 모순, 또는 이 대비! 이 모순 또는 대비를 이제는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진해는 그래서 순수하다. 그래서 봄날 아침 적산가옥 담 밖으로 목련꽃이 툭툭 떨어지는 골목길을 걷고 있는 ‘너’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글·사진= 김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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