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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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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99) 거제 학동흑진주몽돌해변

까만 진주알 데구르르~ 뽀얀 물거품 사르르르~

  • 기사입력 : 2015-04-23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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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학동흑진주몽돌해변. 거센 파도로 뽀얀 물거품이 일고 있다./전강용 기자/

    선생님께.

    선생님, 어김없이 봄은 또 찾아오고야 말았습니다. 한낮에 콧잔등을 스치는 바람에선 훈기가 제법 돕니다.

    저는 창원에서 출발해 거가대교를 타고 한 시간 하고 삼십분쯤 더 달려 이곳 바닷가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린 그 자리에서 저는 제일 먼저 가만히 눈을 감아보았습니다.

    사그락 사그락 하는 소리가 들리네요. 소리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커졌다가 때로는 또 작아졌다 합니다. 마치 꽉 찬 돼지저금통의 배를 갈랐더니 쏟아지는 동전 소리 같기도 하고, 한여름을 지나 맥이 탁 풀려버린 매미가 낙담해 우는 소리 같기도 하네요. 우리 할머니가 예전에 메주를 쑨다고 내 키 반만한 콩자루를 들어 큰 고무대야에 쏟아붓는데 그때 샛노란 콩알끼리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랑도 얼추 비슷합니다. 추억이 깃든 듯한 아름다운 이 소리가 선생님께는 어떻게 들릴지 참 궁금합니다.

    다시 눈을 떴습니다. 해변가라면 으레 있어야 할 모래도 진흙도 없습니다. 대신 새까맣고 맨들맨들한 몽돌이 해안가를 뒤덮고 있습니다. 동글동글한 돌은 물가에서 멀어질수록 크기가 작아집니다. 선생님, 이제 이곳이 어딘지 짐작하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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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학동흑진주몽돌해변.

    맞습니다. 거제입니다. 그중에서도 검은 몽돌로 유명한 학동흑진주몽돌 해변입니다.

    사그락거리는 소리는 다름 아닌 파도에 몽돌이 구르는 소리였습니다. 큰 파도가 오면 조금 더 부지런하게 데구르르 굴렀다가 파도가 뽀얀 거품만을 남긴 채 사라지면 돌은 다시 제자리에서 한숨 고릅니다. 그러나 이내 파도는 다시 돌을 덮치고 또 사그라집니다. 끝없이 반복되죠.

    선생님께서 일전에 말씀해주셨던 것을 떠올리면서 가장 똑같을 법한 모양으로 찾아봤습니다. 돌들이 하나같이 까맣고 동그란 게 하나를 딱 골라내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돌 하나를 집어들었습니다.

    손으로 찬찬히 쓸어보았습니다. 단 한 곳도 모가 난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 돌은 얼마나 애를 썼을까요. 몸 이곳저곳을 파도와 바람에 내어주며 단 한 곳도 더하거나 모자람 없이 매끈한 곡선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파도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을까요. 저는 그 생채기가 안겨준 고통이 어떠했을지 감히 짐작도 안됩니다.

    최도선 시인이 쓴 ‘몽돌애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바람에 깎이고/물에 쓸리며/저희끼리 부딪고 부딪쳐/부서지고 깨지며/속속들이 까맣게 탄 낯빛// 해를 맞으며/파도소리에 지글지글 세상을 읽으며// 슬픔의 깊이에서 마음의 자릴 잡고/반짝반짝/해변에 누운/너를 물끄러미 본다// 누구에겐가 뜨거운 사랑 한 번 주지 못하고/세상 아픈 만큼/으스러져/둥글게 살아/몽돌이 된 너,/주소 하나 지니지 못하고/파도에 쓸려가는 너./세상에 아프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파도에 닳은 몽돌을 보며 인생을 대입했나 봅니다. 파도에 깨지고 부서져 닳고 닳은 몽돌이 마치 세월에 치여 상한 몸과 마음 같다고. 속까지 까맣게 타들어간 낯빛이지만, 주소 하나 없이 파도에 휩쓸리는 몽돌이지만 반짝반짝한 해변에 둥글게 누워 있듯 세상을 아프게 사는 이들끼리 서로 위로를 하며 그렇게 지내자고 말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전 참 모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만이었고,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죠. 그런 제게 선생님께서는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상처를 애써 감추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때는 그 말씀을 완전히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지금은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제 손에 놓인 이 돌도 그러했겠지요.

    손에 쥔 돌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고선 저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몽돌 위를 걸어봅니다. 봄날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몽돌의 온기가 발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마치 선생님께서 제 두 손을 꼭 잡아주셨을 때처럼 따스합니다. 한참을 꼭꼭 밟아가며 걷다 다시 돌 위에 철푸덕 주저앉았습니다. 파도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봅니다. 세상에 어떤 악기도 이런 소리를 낼 수 없을 겁니다.

    앉아 있으니 이따금씩 봄바람이 한 줄기 불어옵니다. 몽돌 구르는 소리가 바닷가를 벗어나 저 멀리까지 퍼지는 듯합니다. 제 가슴 깊숙한 곳에도 밀려와 알알이 박힙니다.

    선생님, 어떠신가요. 선생님께서 십수 년 전 이 자리에 계셨을 때와 지금 제 눈에 비친 모습이, 느껴지는 이 감정이 하나로 포개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못난 제자는 이제 찾아올 시련과 고통에 조금 더 담대해져보려 합니다. 인내하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이 몽돌처럼 제 마음의 결도 매끄러워지겠지요. 파도가 덮쳐와도 비명 대신 아름다운 소리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게 되겠지요.

    추신. 해변가를 따라 이어진 동백나무 숲에 피었던 새빨간 동백꽃은 절정을 지나 꽃을 통째로 땅에 떨구며 낙화(落花)했습니다. 봄길에는 융단이 깔렸습니다. 까만 몽돌과 투명한 바닷물만이 있는, 자칫 심심할 수 있는 풍경이 생기를 얻은 것 같습니다.

    김언진 기자 hope@knnews.co.kr

    ▲학동흑진주몽돌해변

    거제시 동부면 학동리에 있다. 길이 1.2㎞, 폭 50m, 면적 3만㎢ 규모의 해변을 흑진주 같은 몽돌이 가득 채우고 있다. 학동은 학이 날아가는 모습과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학동에서 신선대 쪽으로 가는 길에 내려다보면 학동해변을 중심으로 쏙 들어가고 양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구릉이 마치 학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해안가의 몽돌이 파도에 부딪히는 소리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해안을 따라 3㎞에 걸쳐 천연기념물 제233호인 동백나무 군락지가 자리 잡고 있어, 꽃이 피는 2월 중순부터 관광객으로 붐빈다. 또 6월부터 9월에는 화사함을 자랑하는 팔색조의 번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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