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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해인사 소리길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걸음걸음 푸른 소리

  • 기사입력 : 2015-05-07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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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류동을 지나 해인사와 연결된 가야산 소리길./경남신문 DB/

    어느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처녀지’를 걸어본 일이 있습니다.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광풍처럼 몰아치고 단풍이 붉어 흐르는 물조차 핏빛으로 보인다는 계곡.

    사람들은 그곳을 홍류동(紅流洞)이라 불렀습니다. 출입이 제한돼 차가 달리는 비탈에 서서 곁눈질로 훔쳐봐야 했던 비밀스런 곳이었죠.

    그곳을 저는 이 세상 누구보다 먼저 걸어보았습니다. 2011년 10월, 가을이 한창인 때였습니다. ‘처음’이라 하니, 영광스러웠지만 동시에 조심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웬걸요. 홍류동은 별안간 제 몸에 있는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젖히고 수줍은 처녀가 아닌 당당한 여장부처럼 속살을 드러내보였습니다.



    가을이 한창이던 이곳도 어느덧 초여름입니다. 천지에 연둣빛 잎이 기지개를 켜고 여름철새가 날아듭니다.

    키가 큰 적송, 고욤나무, 졸참나무가 그윽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사슴뿔처럼 보드라운 노각나무가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네요.



    그러나 지난겨울은 혹독했습니다.

    당신이 후학들에게 보여주신 인품에 비춰본다면 ‘겨울이야 매양 춥고 메마른 것이니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저에겐, 지난해 겨울은 유난히 매서웠고 또 빈곤했습니다.

    지난 12월 다비식(茶毘式)이 있던 날 당신의 법구(法軀)가 수백명의 인파 속에서 불태워 사라질 때, 당신을 태운 매운 연기와 재가 제 뺨에 와 닿았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도, 내가 없는 세상에도 봄은 오고 꽃은 피고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제가 처음 이 길을 걷고 햇수로 5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7㎞ 이르는 이 긴 길을 ‘소리길’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걷다 보면 온몸이 귀가 되는 길. 저는 그 길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단 하나의 음절이 되는 길.

    그 길을 걸으며, 저는 토끼처럼 귀만 쫑긋 세운 것이 아니라 두 발의 감각도 예민하게 살려두었습니다. 이제 막 조성된 길 표면은 곱게 간 빵가루를 뿌려둔 듯 포근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발자국에 의해 다져진 이 길은 훨씬 단단하고 견고해져 있네요.



    당신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당신은 열넷 되던 해 ‘단명할 팔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출가합니다. 이후 성철스님을 만나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왔느냐(拖死屍句子)’라는 화두로 참선을 시작해 ‘도림(道林)’이란 법호를 받았습니다.

    제가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던 구절은 당신께서 문경 묘적암에 들던 대목입니다. 32세 되던 해 겨울, 쌀 다섯 되로 밥을 지어 ‘저 쌀이 떨어지기 전에 공부를 마치든가, 이 안에서 죽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겠다’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많이 우셨다는 이야기.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이 종단의 종정(宗正) 자리에 오르기까지, 당신을 견인했던 힘은 여차하면 목숨을 내놓으려던 결기였던가요.



    ‘소리길’에서는 홍류동 계곡을 융단처럼 발밑에 두고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만나게 됩니다.

    최치원 선생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농산정(籠山亭)으로 가는 농산교. 선생이 바둑과 차를 벗하다 바위 틈에 신을 벗어놓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곳, 그 이름도 ‘세속의 시비소리 막으려 흐르는 물로 산을 감싸네’라는 시구에서 유래했다죠.

    그만큼 농산교 아래 물살은 거세고 요란했지만, 정작 다리 너머 정자 안은 죽음처럼 적요했습니다.

    당신께선 2007년부터 종정으로 추대되어 해인사에 머무셨으니 제가 넋을 잃고 농산교에 서 있던 그해 가을, 당신 또한 그 길 끝에 서 계셨을 겁니다.

    눈 어둡고 귀 멀었던 제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겠지요.



    훗날 입적하신 뒤 당신이 서랍에 넣어두고 돌아가셨다는 시를 읽었습니다.

    “설사 바다가 마른다고 해도 그 바닥을 볼 수 있건만(海枯終見底), 사람들은 죽도록 그 마음 바닥을 알려고 하지 않는구나(人死不知心)”

    ‘이렇게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어도 왜 바르게 나아갈 길을 궁구하지 않는가’ 하는 한탄으로 후학들의 게으름을 안타까워하셨던 당신.

    지난해 12월, 저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해인사 보경당에 차려진 당신의 영정에 국화를 올렸습니다. 물론, 그날 하루 밤낮에도 홍류동 물은 변함없이 흘러갔겠지요.



    스님. 그곳에도 새 잎이 살랑대고 새가 우는지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지요. 그 모든 이치를 밝은 눈으로 보고 계신지요.

    이제야 저는 겨우 더듬더듬,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서 있는 이 길의 참뜻은 ‘극락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극락’이란 원점 회귀가 아니라는 것을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제가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온 진짜 이유라는 것을 말입니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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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길, 그리고 도림당(道林堂) 법전(法傳)스님


    지난 2011년 10월 가야산국립공원 측의 도움을 받아 한창 조성 중인 ‘소리길’을 걸어보았다. ‘소리길’은 2011년 가을 합천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에 맞춰 조성된 길이다.

    국립공원 측에서 일반인이 홍류동 내부를 걷는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말해줬다. 솔직히 그땐 멋모르고 기사를 썼다. ‘소리길’ 끝에 해인사가 있고, 그에 따른 수많은 권속들을 이끄는 법전(法傳)스님이 그곳에 계신 것을 알지 못했다.

    2014년 12월 스님이 입적하셨다. 다비식이 있던 날, ‘소리길’을 지나 연화장에 올라 스님이 열반에 드시는 것을 지켜봤다. 거대한 불에서부터 자욱한 연기와 시커먼 재가 날아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내 몸에 닿았다. 이후 도림사와 해인사에서 열린 스님 49재에 갈 기회가 매주 찾아왔지만 먹고사는 생업이 바빠 가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소리길’에 서 있다. 여기에 서 있는 이 몸과 마음이 5년 전 그것이 아니듯, 이 길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게 느껴진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제야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걷는다고 그게 다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산다고 그게 다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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