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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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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지금 웃음이 나오나요?- 서영훈(사회2부 부국장대우)

  • 기사입력 : 2016-04-0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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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유럽을 다녀와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그 나라 사람 표정은 밝을까. 왜 그들은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기라도 하면 미소를 띨까.

    아마 풍족한 생활 때문에 밝은 표정을 짓겠거니 했다. 아무리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나라라고 해도, 명색이 선진국들이다. 불황이 닥쳐도 먹고사는 데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라 짐작했다. 소득의 절반 안팎을 세금으로 내기는 하지만, 교육과 의료가 거의 무상으로 제공되고 있으니 큰 걱정거리를 덜고 있다. 그러니 거리에서 맞딱뜨리는 그들의 표정은 대개 밝고, 또 이웃을 만나면 눈인사라도 하는 여유를 가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관광 왔거나 업무차 방문한, 검은 머리에 키 작은 생면부지의 동양인들에게도 눈인사를 하는 건 뭘까. 자기 나라에 와서 돈을 뿌려주는 고마운 마음에 그런가. 아니면 가진 자의 자만인가.

    한국에서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의 외국인노동자들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가 흔하지 않다. 하얀 얼굴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서양인들에게 보내는 시선과 탁한 얼굴색에 키작은 이들에게 보내는 그것은 사뭇 다르다.

    그런 의문이 든 지 한참 후,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웃어 보이는 것은 적의가 없다는 유럽인 특유의 몸짓이라는 해석을 접하고는 실소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지금의 펜싱경기 때나 쓰는 칼로 결투를 벌이는 일이 잦았다. 근세로 넘어와서는 결투의 도구가 칼에서 권총으로 바뀌었다. 재판의 연장선상에서, 아니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 그들은 결투를 했다. 심지어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로 인상을 찌푸린다면 이는 곧 결투를 의미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죽을 수도 있는 결투가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이뤄질 수도 있었다.

    결투를 피하려면, 죽음을 면하려면, 웃어야 했다. 나에게는 당신과 결투할 의사가 없다는 신호를 보내야 했다. 그런 신호가 관습이 됐다. 꽤 재미있는 풀이다.

    엊그제 ‘웃음경영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대학교수를 만났다. 지금처럼 힘든 시기에 어떻게 하면 웃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억지로라도 웃어라고 했다. 그것도 크게 웃어라. 그러면 긍정적인 힘이 생긴다고 했다.

    ‘회장님’들은 저질스런 갑질을 쏟아내고, 정치권은 국민을 입에 올리며 이전투구를 벌인다. 삶에 지친 청년들은 한국사회가 지옥 같다며 ‘헬조선’을 외친다. 웃음이 아니라 분노가 터져나올 시기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크게 웃어 보자. 마침 총선이 코앞이다. 분노를 넘어,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의지가 솟구칠지도 모른다.

    서영훈 (사회2부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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