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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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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기자 25시] 49기 박기원 (4) 예사로 보지 않겠다

  • 기사입력 : 2017-04-17 15: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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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소방서를 박차고 나가는 소방차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사이렌 소리는 웅장하면서도 고귀하다. 그 소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러 가는 소리다. 사고의 경중은 대체로 사이렌 소리의 요란함에 따라 나뉜다. 큰 사고일수록 사이렌 소리는 더 웅장하고 소방차를 뒤따르는 차량의 행렬이 길어진다. 화재 현장에서 사람들은 검붉은 불꽃을 피해 뛰쳐나오지만, 소방관들은 지체 없이 불꽃을 향해 뛰어들어간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해 간밤에 일어난 화재 사고를 확인한다.

    손에 쥔 화투패를 슬며시 확인하듯 보고서를 조심스레 마우스로 끌어 내린다. 부상자가 없다는 사고 개요를 보면서 안도한다. 안타까운 탄식보다 안도의 숨을 내쉴 때가 더 많다. 화재로 인한 피해 금액은 차치하고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왠지 마음이 뿌듯해진다. 그리고 지난밤 고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불 속으로 달려 들어간 이들에게 심심한 격려를 보낸다. 만약 내가 위험에 처한다면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사람이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하는 일만큼 고귀한 일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소방차가 지나가는 길을 터주는 자동차들을 일컬어 모세의 기적이라 부른다. 하지만 나는 기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화마에 휩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경광등을 번쩍이며 쏜살같이 도로를 누비는 경찰차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밤사이 경찰서에 들어온 사건들은 혀를 내두르게 하는 일들이 많다. 술에 취한 상태로 가게에 들어가 택시를 불러 달라며 난리 친 사람, 지인들과 정치 얘기로 아귀다툼한 사람, 자신의 화를 못 이겨 주차된 차와 한바탕 씨름한 사람. 간밤의 왁자지껄한 소란이 지나가면 경찰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아침을 맞이한다. 이른 아침 경찰서에서는 이들에게 고문당한 당직 경찰관의 지친 눈빛을 볼 수 있다.

    나는 지친 눈을 하고 있는 그들을 붙잡아 다시 한번 괴롭힌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그랬습니까?". 그러면 항변할 수 없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도대체 박 기자는 왜 그러십니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경찰과 숙면을 취한 기자의 미묘한 신경전은 한쪽이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을 때 비로소 해소된다. 퉁명스럽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경찰과의 신경전은 일주일 동안 계속됐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달라지는 게 있다면 그들의 얼굴과 이름이 점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예사로 느껴지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기자에게 털어놓으려는 제보자의 간절함이 예사로 느껴지지 않는다. 선배와 동행해 몇몇 제보자를 만났다. 두꺼운 서류뭉치를 들고 와 펼쳐놓는 사람, 도로 폭을 재기 위해 허리춤에 줄자를 차고 나온 사람,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했지만 삼십 분 동안 전화기를 놓지 않는 사람. 제보의 방법과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의 간절함은 하나같이 오감을 통해 내게 전달됐다. 이들 앞에서는 말하기보다 듣기가 주를 이룬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제보자와 마주한다면 얘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에 늦은 이가 그 분위기에 맞춰가기 위해 술을 연거푸 석 잔 털어내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좋은 기사는 제보자가 제공한 정보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가치 있는 기사가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혹 그들의 간절함을 진실로 착각해버리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선배에게 배웠다. 말하는 것은 제보자의 몫이고, 그것을 듣고 검증하는 일은 기자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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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신문에 인쇄된 내 이름 석 자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이름 옆에 적힌 '수습기자'라는 글자를 포함한다면 사실상 일곱 글자다. 3매 분량의 짧은 기사였지만 선배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바이라인을 보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그동안 숱한 실수를 했고, 그 실수로 인한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지금은 수습기자의 이름을 단 조연이다. 주연이 되기 위해 기본을 다져가며 한 걸음씩 나아가겠다. 주연이 되기 위해 사소한 것 하나라도 예사로 보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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