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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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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31) 뜨거운 사람들/이현승

  • 기사입력 : 2017-12-01 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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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해 여름은 무더웠다.
     모두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덥다, 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춥기만 했다. 서럽기만 했다.
     집에서 새벽 별을 보고 나와 경찰서 형사계와 교통조사계를 돌았다.
     어느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나는 당직관을 깨워 지난 밤의 일들을 캐물어야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야만 했다.
     
     그들은 대충 대답했고, 한번 더 물으면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여름 추위는 그들이 나를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을 이해한다는 데서 기인했다.
     그래. 저 사람들도 힘들겠지. 나만큼 힘들겠지.
     요령부득인 기자실 문은 시베리아 벌판으로 나아가는 입구였고
     득달 같은 제보전화는 악머구리들이 끓는 세상으로 가는 확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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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의 한 장면.

     그리고 거기엔 비슷한 처지의 기자들이 있었다.
     방송사나 신문사 보도국, 편집국 사회부 소속의 K와 C, S와 H…
     우리는 아직 어렸고 매일 지역사회의 최전선에 내몰렸다.
     사건이 없어도 문제, 사건이 터져도 문제였으므로.
     사건들은 대게 우리와 하등 관계가 없었으며 관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일들이었지만
     우리가 속한 회사가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작정한 이상
     우리는 지대한 관심이 있는 척, 능숙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가 되어야 했다.
     
     그들 중에서도 유독 새벽 같이 기자실에 드나드는 건 C와 나.
     나는 아직 마르지 않는 축축한 머리칼에 화장을 하지 못한 맨 얼굴로 C와 마주쳐야 했다.
     C도 지난밤 마셔댄 술을 다 깨지 못한 얼얼한 표정으로 나와 마주쳤다.
     우리는 대충 서로에게 인기척을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형사들과 조사관들을 찾아다녔다.
     엇비슷한 것들을 물었을 것이고 엇비슷한 대답들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훗날 C가 나에게 쏘았던 화살을 돌이켜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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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하는 일 없이 몸이 피곤했다.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싣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문제를 상당히 관심 있는 척 들어줘야 했다.
     누군가는 내게 욕을 했고 누군가는 아첨을 했다.
     당장 간이나 쓸개 정도라면 충분히 빼내어 줄 수 있을 만큼
     '기자님, 기자님' 애타게 나를 부르던 이들도
     내가 기사에 자신의 입장과 배치되는 의견을 싣거나,
     지역언론에 힘을 실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댁에 신문 한 부 보시는 게 어때요?"라고 말하면 얼굴색을 싹 바꿨다.
     
     '님은 누구세요?' 라고 쓰인 가면 같은 표정은 양반 축에 속했고
     '니가 뭘 안다고', 혹은 '웃긴 여자 다 본다'는 표독스런 얼굴도 허다했다.
     그러나 견뎠다.
     그들 입장에선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특종도 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딱히 낙종도 하지 않은
     그렇고 그런 기자였다. 그걸 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추웠다.
     
     주말엔 잠만 잤다.
     자다가 배가 고파 깨면 피곤한 몸이 자극적인 맛을 원했다.
     맵거나 짜거나, 느끼한 것들을 와구와구 먹고 다시 혼곤한 꿈속으로 떨어졌다.
     일어나면 월요일 새벽이었다. 나는 다시 경찰서로 갔다.
     
     그날 '술을 먹자'고 제안한 건 C였다.
     마침 모두가 시간이 되었다.
     인근 번화가의 로바다야끼에 삼사오오 모였다.
     누구는 일찍왔고 누구는 마감을 하느라 조금 늦었다.
     몸과 정신이 고단했던 우리는 따뜻한 술의 힘을 빌어 차례차례 저마다의 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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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C가 내게 농을 걸기 시작했다.
     김 기자, 매일 새벽 같이 오잖아. 그런데 오기 싫지? 맞지? 얼굴에 표가 다 나.
     나는 그냥 웃었다. 다만 C가 나에게 '하대'를 한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말해 봐, 싫잖아. 안 그래? 꾸역꾸역 오긴 오는데 너무 싫은 거잖아. 그지?
     모두가 내 얼굴을 쳐다봤다.
     저 사람, 보기보다 집요한 걸까, 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술이 시킨 말이었을까. 내 잠재의식이 시킨 말이었을까.
     근데 C, 왜 반말이니. 언론사 경력으로 치면 너 나한테 한참 후배 아니니.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K와 S와 H가 중구난방으로 내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맞아, 맞아, 한참 후배지. 어서 사과하고 선배라고 불러요.
     그때 C가 내 등에 화살을 갖다 꽂았다.
     야, 선배 후배 서열이 중요하냐? 인풋이 똑같아도 아웃풋이 좋아야 선배 대접을 받지.
     
     그날 나는 술을 엄청 마셨다.
     마지막엔 C와 S, H, K가 보는 앞에서 눈물도 뚝뚝 흘렸다.
     그래놓고 나오면서 호기롭게 계산도 내 카드로 했다.
     그들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그날 새벽 나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혈액검사니 뭐니 온갖 검사를 마치고 나와 거대한 종합병원의 불꺼진 병동을 바라봤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이제 다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겠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를 가지고 사직의사를 표했을 때,
     회사에서는 휴직을 제안했다.
     
     휴직 기간 중 C에게서 전화가 한번 왔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단박에 받아버렸다.
     김 기자. 많이 아파? 휴직했다며…
     나는 어쩌다보니 일이 그렇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C가 나의 신변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지 잘 몰랐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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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곧 복직을 했고 지금까지 비슷한 일을 반복하며,
     그러니까 지역사회 현안에 사실은 딱히 관심 없지만 관심 있는 척 연기를 잘 해나가며 살고 있다.
     그리고 이건 일종의 고백이지만, 우리 모두는 연결된 존재라는 것, 그러므로 이 지역사회 내부의 모든 것이 나에게 관계 되어 있으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것이 기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썩 나쁘지 않다.
     
     C도 그런 것 같아보였다.
     지난해 가을, C가 광화문에서 취재를 하다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
     '적폐언론은 사라져야 한다'는 뭇매를 맞으며 멀리 내쫓기는 영상을 보았다.
     그 영상은 SNS를 떠돌며 꽤 유명해져 있었다.
     시절이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지난해 가을은 국정농단 사태의 도가니, 그 한가운데였으니 말이다.
     
     그 영상을 보는데 갑자기 추워졌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았다.
     C도 지금 등에 화살을 맞고 있구나.
     좀 아프겠구나. 술을 많이 먹을 것이고 어쩌면 응급실에 실려갈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부디 그만두지 않기를 바랐다.
     나도 그만두지 않았으니까.
     다들 그렇게 어른이 되고, 기자가 되고, 뭐 그렇고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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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약한 사람들이 동정심에서 출발하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적의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아이들은 떼로 몰려다니면서 개들을 죽이고
     어른들이 학교 정문에 비틀거리면서 오줌을 누는 밤
     
     밤사이의 악행들은 눈 위에 선연한 자국을 남기고
     다시 내린 눈이 가만히 그걸 봉합했다.
     밖에 나가보지도 않았으면서
     그 사실을 눈치챈 자들은 늙은 사람들이었다.
     
     잔뜩 달궈진 인두처럼 시뻘건 눈으로 봐도
     세상은 차고 하얗게 보인다.
     밤새 고열과 오한을 오가면서
     졸아붙은 냄비 같은 눈으로 입술로
     우리는 사막을 건너가는 중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눈 내리는 소리를 듣는 것일까.
     눈도 보지 못하는 개들이 혼백을 본다고
     밤에 개들이 짖는 것은 혼백이 다녀가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미라처럼 누워 그르친 일들을 생각하다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이 부딪는 소리가 들릴까.
     그래서 작은 바람에도 살갗이 그렇게 아픈가보다.'
     
     '뜨거운 사람들'-이현승/창비/생활이라는 생각(2015)/104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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