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생활 속의 풍수지리] 함안 명당, 생육신 조려 고택과 고려동

  • 기사입력 : 2019-08-02 08:07:26
  •   

  • 생육신(生六臣)은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탈취하여 세조에 즉위하자 세상 속의 삶과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사람을 일컫는 말로서 ‘절의파, 청담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어계(漁溪) 조려(趙旅), 관란(觀瀾) 원호(元昊),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문두(文斗) 성담수(成聃壽),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그들이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생육신 중 한 명으로 단종 3년(1453)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학문에 정진하며 여생을 보냈던 어계 조려(1420~1489) 선생의 고택이 있다. 어계의 삶을 중국 주나라 때 불사이군의 충신인 백이와 숙제에 비유하기도 하며 원북리 앞산을 백이산(369m), 남쪽 봉우리를 숙제봉, 북쪽 봉우리를 백이봉이라고 부른다. 고택은 주산인 방어산(532.1m) 산줄기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산진처(山盡處)에 위치하고 있다. 주산(뒷산)의 형세(形勢·산의 모양과 지세)가 뛰어나며 급하게 내려오던 산줄기는 계곡의 물줄기를 좌우측에 두어 집터의 지기(地氣)를 강화시키면서 최종 고택의 자리에 안착했다. 이러한 터는 대개 묏자리보다 집터로서의 사용 가치가 더 있는 곳이다.

    고택은 대로(大路)인 ‘사군로’에서 곧장 들어오다가 휘어지면서 소로(小路)인 ‘원북길’이 둥글게 감아준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로가 터를 보호하고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국이다. 고택의 좌우측에 있는 집들이 좌청룡과 우백호 역할을 해 흉풍(凶風)과 살기(殺氣)를 막고 있으며, 안산(앞산)은 적절한 높이를 유지함으로써 앞쪽에서 부는 흉풍을 차단하고 있었다. 안산은 높으면 눈썹의 높이요, 낮으면 심장의 위치가 가장 적당하며 가지런하면서 혈(穴)에 순응하는 형상이 좋다. 만일 안산이 너무 멀거나 낮으면 흉풍을 막기 어려우며 너무 높으면 압혈(壓穴)이 돼 생기를 누르므로 발복(發福)은 요원하게 된다. 고택은 대문채와 지금은 후손들이 재실로 사용하는 원북재(院北齋)와 사당으로 구성돼 있다. 주 건물인 원북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평면이다. 원북재 현판을 중앙으로 좌측에는 어계고택(漁溪古宅), 우측에는 금은유풍(琴隱遺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선생의 조부인 조열(趙悅)의 호가 ‘금은’으로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 사당에는 조묘(廟)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원조(遠祖)를 합사(合祀)하는 사당이란 뜻이다. 사당 뒤쪽에 있는 대나무는 자연의 바람 소리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계곡의 찬바람을 막고 땅심을 강화시키는 비보목(裨補木)이다. 터의 기운이 대단히 좋은 곳이다.

    함안군 군북면에 조려 선생이 있다면 산인면의 고려동(高麗洞)에는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이 있다. 고려동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마을이다. 이오는 담장을 쌓고 ‘담 밖은 조선이라도 담 안은 고려’라며 ‘고려동학’이란 비석을 세워 담 안에서만 난 곡식을 먹었다. 그뿐 아니라 아들 이개지(李介智)에게는 평생 벼슬하지 말도록 했으며, 조선 시대에 태어난 손자부터 벼슬을 하도록 했다. 죽기 전에 당부하기를 고려를 위해 한 일이 없으니 백비(白碑·글자가 없는 하얀 비석)를 세우도록 유언했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다. 마을을 향해 뻗은 진입로는 좌우로 요동치면서 힘차게 전진하는 사행로(蛇行路)이다. 종택(宗宅)은 우백호가 고택을 감싸고 있으나 좌청룡은 달아나므로 허한 곳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심었다. 주산의 산줄기가 안채와 계모당, 효산생가에 생기를 공급해 땅심이 좋으며 복정(鰒井)과 자미정 뒤쪽의 연못은 음양배합을 잘 시켜 좋은 기운을 발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연못을 정자 뒤에 둔 것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터라 여겨 앞쪽의 응봉(鷹峰·매 형상의 산)을 보지 않기 위함인데, 종택 주위를 도로가 감싸고 있으므로 도로는 물과 같아 필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사방이 물로 에워싸인 가운데 있는 명당)으로 본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