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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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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송소고택이 특별한 이유

  • 기사입력 : 2019-10-18 07:4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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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송군 파천면에는 조선 영조 때 만석꾼으로 불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고종 17)에 지은 ‘송소고택’이 있다. 건립 당시 99칸짜리 대저택으로 대문 바깥의 노비가 기거하던 7칸짜리 집은 소실되고 92칸이 남아있다. 송소고택은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와 함께 9대에 걸쳐 250여 년간 만석의 부를 누렸던 영남의 대부호로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고택이며, 현재 청송 심씨(靑松 沈氏) 11대손 심재오가 지방자치단체의 협조 하에 관리를 하고 있다. 청송 심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3명의 왕후(세종비 소헌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와 13명의 정승, 4명의 부마를 배출했다.

    고택 가까이에서 주산(뒷산)의 산줄기가 넓게 벌어지며 고택을 가볍게 감싸고 있어 좌우 계곡의 바람과 물로부터 보호를 하고 있다. 앞쪽의 하천은 마치 허리에 옥대(玉帶)를 찬 듯이 고택을 둥글게 감싸며 흘러가는 ‘금성수’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의 전형적인 틀을 갖추고 있다. 안산(앞산)은 곡식더미를 쌓아둔 것 같은 노적가리 형상의 노적봉(露積峯)이 여럿 있다. 고택을 둘러싼 산들은 단아하고 유정하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뛰어난 산수(山水)는 거주자의 성정을 가다듬게 한다”고 했다.

    집터는 생기(生氣)를 발산하며 품격 또한 갖추었다. 솟을대문 천장에는 악귀를 막기 위한 비보책(裨補策·모자라는 것을 채우는 방법)으로 홍살을 두었으며, 고택의 특성상 나무로 인한 화재를 예방할 목적으로 물병 모양의 나무 조각을 해두었다. 전통가옥의 대문은 집안으로 복이 들어오라는 의미로 안쪽으로 열었으며, 방문은 나쁜 기운이 나가라는 의미로 바깥으로 열었다. 고택의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를 바로 볼 수 없게 하고, 바깥에서 집안으로 부는 흉풍을 막음과 동시에 안채로 드나드는 여인들을 볼 수 없도록 헛담(내외담)을 설치했다.

    큰 사랑채 마당에는 흉풍이 치는 것을 막기 위해 흙을 돋우어 전나무와 회양목 등을 심었는데, 이것을 동수비보(洞藪裨補)라 한다. 큰 사랑채의 기단은 3단으로 하고 작은 사랑채의 기단은 2단으로 했으며 작은 사랑채는 큰 사랑채보다 뒤로 약간 물렸는데, 이 또한 어른을 공경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안채는 ‘ㅁ’자형으로 외부의 흉풍과 살기(殺氣)로부터 안채를 보호하고 있다. 마루 끝 단면과 서까래 끝 단면이 비바람과 해충에 손상되지 않도록 ‘사래기와’를 둔 것도 일종의 비보책이다. 관광객의 숙소로 제공하는 별채는 도깨비 형상의 낮은 굴뚝이 있는데, 도깨비 형상은 악귀를 쫓고 연기는 외벽을 소독하며 낮은 굴뚝은 빈자(貧者·가난한 사람)가 연기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청송군 청송읍에 고려 충렬왕 때 위위시승(衛尉寺丞·병기와 기물을 담당하던 종6품 관리)을 역임한 청송 심씨 시조인 청기군 심홍부 묘가 있다. 묘 뒤쪽의 용맥(龍脈·산줄기)은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으며 좌우로 요동을 치면서 살아있다는 증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안산은 적절한 높이에 있어 묘를 향해 부는 바람을 막고 있으며 장명등도 묘 앞 중앙에 설치해 ‘바람길’을 돌려 풍해(風害)를 입지 않도록 했다. 청룡(좌측 산)과 백호(우측 산)는 본신용호(本身龍虎·주룡에서 뻗은 청룡과 백호)로 적정한 높이를 갖추었다. 사나운 계곡풍은 나무를 심어 막았지만, 산줄기가 가팔라서 묘와 접한 뒤(입수)와 앞(전순)과, 옆(선익)은 토석으로 인작(人作·사람이 만듦)을 많이 가했다. 묘 앞쪽에는 양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만나서 지기(地氣)를 강화시킨 후 보광사 옆으로 지나가는데, 묘의 생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수구막이’의 역할을 보광사가 하고 있다. 대개 묘 앞으로 양쪽 계곡물이 합수(合水)가 되면 좋은 자리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는 ‘기계수즉지(氣界水則止·기는 물을 만나면 즉시 정지한다)’이기 때문이다. 비록 성토를 하고 석축을 높게 쌓아 묏자리를 조성했으나 시조 묘는 혈처(穴處)에 정확히 안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주산이 근본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화산풍수·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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