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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④ 이병철의 서울 유학, 일본 유학 그리고

[1부] 또 하나의 가족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④ 이병철의 서울 유학, 일본 유학 그리고
지수보통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 중동중 재학 중 일본으로

  • 기사입력 : 2021-07-23 0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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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철은 지수보통학교에서 3학년 1학기를 공부한 후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자 1922년 9월 서울 수송공립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이 시기 고향 의령 정곡면에는 정부 교육령에 따라 1923년 4월 개교를 위한 정곡보통공립학교 신축공사가 한창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6개월의 기간 차이로 인해 이병철과 정곡보통학교와의 인연은 맺어지지 않았다.

    수송보통학교는 서울 가회동에 있는데 이곳과 가까운 곳에 외가가 있어 이병철이 학교에 다니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밝히기를 “서울에서 학교성적 중 산술성적은 학급에서 상위점수를 받았고 그 외 다른 과목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학급 석차도 50명 중 35등에서 오르내렸다”고 한다. 4학년이 되자 이병철은 보통학교에서 배울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단기간에 마칠 수 있는 중동중학교 속성과에 가서 공부할 결심을 하고 1925년 4월 중동중학교 속성과에 편입했다. 중동중학교 속성과는 1년 만에 보통학교 5, 6학년 과정을 공부하는 곳이다. 여기를 수료해야만 중학부에 입학이 가능했다.

    속성과를 마친 이병철은 이듬해 1926년 4월 중동중학교 본과(5년제)에 입학을 했다. 중동중학교 과정도 이병철에게 큰 기대를 주지 못하였는지 4학년까지 재학한 후 중퇴를 했다. 한편 이병철은 중동중 재학 때 선친의 뜻에 따라 17세 때 결혼을 했다. 당시에는 조혼의 풍습이 남아있던 시기이고 특히 유교 집안은 대부분 조혼을 거부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중동중 재학 중 방학이 되자 고향에 내려온 이병철은 아버지에게 유학을 가겠다는 결심을 전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든 성급히 뛰어들지 말거라. 일을 무리하게 처리하려 해서는 안된다. 무슨 일이든 결국 옳은 이치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사필귀정을 인용한 훈시를 강조하면서 일본 유학을 허락한다.

    이병철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이병철의 학교 이력은 조금 특이하다. 지수보통학교, 수송보통학교, 중동중학교, 와세다 대학 등 학교를 4곳이나 다녔지만 모두 전학이나 중퇴, 수료라 졸업장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외가가 있던 가회동서 수송보통학교 통학
    1925년 중동중 속성과 편입 후 본과 입학
    1930년 日 와세다대학 정경과 들어갔지만
    각기병 걸려 2학년 중퇴… 다시 고향으로
    20대 중반이었던 1934년 사업 투신 결심

    1923년 의령 이병철의 생가 인근에 설립한 정곡보통학교의 1928년 졸업사진 풍경이다. 보통학교 학생들이 모자를 쓰고 한복 두루마기 복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 교사인 듯 제복차림에 긴 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의령 정곡초등학교/
    1923년 의령 이병철의 생가 인근에 설립한 정곡보통학교의 1928년 졸업사진 풍경이다. 보통학교 학생들이 모자를 쓰고 한복 두루마기 복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 교사인 듯 제복차림에 긴 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의령 정곡초등학교/

    # 일본 유학, 그리고 귀국

    1930년 4월, 이병철은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정치·경제)에 입학을 했다.

    자서전에는 지수보통학교, 중학교 등 학교를 전전하면서 착실하게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뒤늦게 일본에서 대학교 생활과 공부에 몰두했다. 책도 많이 읽고 난생 처음 진지하게 책과 사귀고 사색에 잠겼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이병철은 뜻하지 않게 각기병에 걸렸다.

    휴학하고 여러 가지 치료를 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결국 일본에서 치료도, 유학 생활도 단념하고 1931년 9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와세다 대학 2학년 중퇴이자 이병철에게는 마지막 학교생활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병철은 중교리의 맑은 산세와 편안한 가정에서의 생활로 병도 치유되고 건강도 회복했다. 1934년 10월 이병철은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다. 관공서 관리가 될 것인가,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고민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본인 스스로 성격에 가장 알맞다고 판단한 ‘사업’에 그의 인생을 투신하자고 결심을 한다.

    “아버님 사업을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보통학교 학생용 산술(산수)교과서

    해방 이후 미군정기 교과서

    건국 이후 경상남도에서 발간한 교과서

    이병철이 보통학교 3학년 때 배운 것으로 보여지는 산수 교과서로 일본어로 되어 있다. 시대별 교과서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김영구 수학교과서연구소/

    # 이병철과 중동학교 인연

    중동학교는 1906년 4월 관립 한성한어학교로 출발해 1919년 사립중동학교로 개칭했다. 지금 중동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이병철은 1994년 6월 본인이 다녔던 중동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인수했다.

    11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동고등학교는 삼성그룹의 지원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명문 사학으로 성장했다. 졸업생으로는 안호상, 윤치영, 양주동, 이희승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지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 탤런트 정동환, 이병헌, 정치인 김무성, 문국현, 오세훈 현 서울시장 등 역사가 긴 만큼 졸업생의 구성도 다양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가려면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부관연락선을 타야만 했다. 수십만명을 실어 나른 만큼 사연도 많다. 이러한 사연을 바탕으로 작가 이병주는 ‘관부연락선’을 출판했다. /부산역사문화대전/

    # 부관(관부)연락선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로 시작하는 ‘사의찬미’ 노래를 불렀던 윤심덕이 현해탄(대한해협)에서 투신자살했다. 당시 타고 있던 배가 관부연락선이다.

    1920~1930년대 일본 동경을 가는 유일한 방법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가서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간 왕복하는 배를 부관(관부)연락선이라 한다. 1905년 9월 25일 첫 취항했다. ‘부관(釜關)’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앞글자(釜, 부)와 시모노세키(下關, 하관)의 뒷글자를 딴 것이다.

    1929년 10월, 이병철은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지금이야 부산에서 비행기로 시모노세키까지 1시간 만에 도착하는 가까운 거리지만 당시에는 11시간이나 소요됐다. 당시 한일병합 후 일본에 가는 조선사람은 1920년대 후반 15만명 정도였다. 이병철처럼 유학을 가거나 돈을 벌기 위해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1936년에는 약 70만명이 부관연락선으로 일본에 갔다.

    1968년 4월부터 약 2년간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중앙에 일제 강점기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운항하던 연락선을 주제로 한 장편 소설이 작가 이병주가 쓴 ‘관부연락선’이다.

    # 이병철의 중동학교 수학선생 이상익

    이병철은 1925년 4월 중동학교 속성과, 1926년 4월 중동중학교 본과에 입학을 했다. 이병철은 학교성적 중 산술(산수)과목은 학급에서 상위점수를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중동학교 재학 시기에 이병철에게 수학을 가르친 교사가 ‘근세산술(산수)’을 집필한 이상익 선생이다. 이상익은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동생이다.

    1907년 6월 15일,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세분의 특사를 보냈다. 그중 한 분이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이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교육자, 수학자이기도 하다. 이상설 선생은 근대 수학을 정리한 ‘수리’와 ‘산술신서’를 저술했다. 이상설 선생의 증손은 “이병철이 학창시절 수학과 과학을 잘하였다는 이야기를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이병철의 수학적, 과학적 사고에 기반하여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로움이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한 이야기도 있다.

    <이병철의 한마디>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다.

    이 래 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이래호 ㈜차이나로컨벤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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