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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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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움직이지 않는 비애(悲哀)-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21-09-02 20: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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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007년 가을, 지금은 휴간 중인 〈시인세계〉라는 시전문 계간지에서 대한민국의 내로라는 시인 109명을 대상으로 재미있는 설문조사를 했다.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현대시’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구절을 뽑아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설문조사라는 형식은 종종 재미와 호기심에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호기심의 충족을 넘어 공인(公認)과 권위(權威)라는 일종의 권력과 연루된다. 이 설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떤 시구가 가장 많은 시인에게 ‘벼락’을 쳤을까도 궁금했지만, 누구의 시가 가장 많은 ‘벼락’을 쳤을까를 더 궁금해했다. 왜냐하면 권력과 권위는 시보다 시인에게 귀착되기 마련이니까.

    결과는 설문에 응답한 시인 109명 중에서 무려 14명에게 ‘벼락’을 친 김수영이 1위였고, 9명의 서정주, 7명의 정지용, 6명의 이상과 백석, 5명의 윤동주와 김종삼, 4명의 한용운과 김소월과 이성복 순이었다.

    특히 김수영의 시 〈비〉의 첫 구절은 천양희와 장석주 시인이 같이 지목해서 화제가 됐다. 그 구절은 이렇다. “비가 오고 있다/여보/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비〉라는 시는 김수영의 좋은 시들이 그렇듯이 전체적인 의미를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시를 좋아할 때 반드시 그 의미를 다 알아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시가 난삽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구절에 매료돼서 그 시를 좋아는 경우는 허다하다. 오히려 난해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읽을 수 있어서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 이 시도 그러하다. 내리는 비를 두고 ‘움직이는 비애’라고 표현한 첫 연의 세 줄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니 굴지의 중견 시인 두 명이 공교롭게도 이 구절에서 전율을 느꼈다고 응답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이 설문의 방식이나 결과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많았다. 무슨 기준으로 109명의 시인을 골랐는가도 문제였겠고, 왜 나에게는 묻지 않는지 불쾌해 하는 시인도 있었을 법하다. 설문을 부탁받는 것만으로 이미 당대의 문학적 권위를 인정받는 셈이어서, 설문의 결과도 문제적이었지만 과정도 문제적이었다는 얘기다. 이처럼 ‘설문’이란 남들의 생각이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우리 안의 욕망을 가장 대중적으로 충족시켜주는 탓에 재미있지만 위험하다.

    요즘 수시로 ‘여론조사’라는 명목으로 설문을 받는다. 간단한 자동차 수리 후 만족도 조사에서부터 차기 대통령 후보감에 이르기까지 ‘나’의 의견을 물어온다. 내년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정치설문’에 시달릴 것이다. 설문이 정치를 만나는 순간 묻는 자도 답하는 자도 서로를 속여야 한다. 정치는 보이는 징후로써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점치고 배팅해야 하는 일종의 도박이니까. 그러므로 정치인들에게 설문이라는 ‘인기투표’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움직이는 비애’일지 모르지만, 서민들에게 이것은 빈손으로 치는 고스톱처럼 긴장도 재미도 없는 ‘움직이지 않는 비애’일 수도 있다. 한 구절의 감동도 느낄 수 없는 정치언어에서 서민들이 느끼는 건 ‘비애’밖에 더 있겠는가.

    김남호(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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