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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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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조재영(창원시립마산문학관 학예사·시인)

  • 기사입력 : 2021-10-19 20: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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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주던 사진사가 있었다. 사진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석에서 촬영하고 돈을 지불하면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전해 주곤 했다. 그 사진사 덕분에 시골에서 생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흑백 사진으로나마 남길 수 있었다. 그 사진들은 돌사진을 제외하고는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 되지 않던 그 사진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졌다. 당시는 한 사진을 여러 장씩 인화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대부분 단 한 장의 사진만 있었다.

    가족들이 하나둘씩 분가를 하거나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사진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분실되었다. 집안의 앨범에는 빈자리가 곳곳에 생기고 기억도 빈자리를 만들었다. 분명히 기억 속에는 존재했던 사라진 사진의 존재가 한없이 그리웠다.

    내가 아쉬워한 것은 사진이 아니라 기억이었을 것이다. 내 아이들과 조카들에게 종종 고향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있다. 보름 달빛 가득한 마당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벼를 밤새 탈곡하던 이야기와 눈이 왕방울만한 소가 입김을 푸우-푸우- 내쉬면서 여물을 먹던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모두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내가 경험했던 고향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모습으로 말이다.

    예전에 사진 회사의 광고문구 중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상업용 문구답지 않게 서정적이라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 가끔은 기록되지 못했던 시절의 추억이 그리울 때, 그리운 순간들은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면 문득 그 문구가 떠오르곤 한다.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겨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늘이 내 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고 하지 않던가. SNS에 올리는 사진이 아니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이 평범한 삶의 모습들을 뜻깊은 기록으로 남겨보자. 언젠가 그 순간들이 미소로 떠오를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이다.

    조재영(창원시립마산문학관 학예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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