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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왕관은 차고에 벗어두고 오렴- 허성원(신원국제특허법률 사무소 대표 변리사)

  • 기사입력 : 2022-05-01 20: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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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에 만난 그는 밝은 모습이었다. 몇 년 전 큰 어려움에 처한 그를 도와준 적이 있는데 이제 형편이 좋아진 듯하다. 다소 겸손이 과하다 여겨졌던 이전의 모습에 비해 이제는 자신감을 넘어 교만함이 엿보인다.

    그런데 식사 자리에서 크게 실망할 일이 벌어졌다. 종업원의 작은 실수에 대해 그가 너무 무례하고 과도하게 닦달하는 것이다. 지켜보는 나 자신이 그 종업원의 입장으로 추락한 것 같은 모멸감이 느껴졌다.

    이런 사람은 장경오훼(長頸烏喙)형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다. 장경오훼는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 같이 뾰족하다는 뜻이다. 범려는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후, 곧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서 절친한 문종(文種)에게 편지를 썼다. “날아다니는 새가 다 잡히면 활은 감추어지고(鳥盡弓藏), 날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게 되오(免死狗烹). 월왕의 사람됨이 목이 길고 입이 뾰족하니, 환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가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어찌 떠나지 않소?”(사기 월왕구천세가)

    범려는 관상학을 말하기보다, 월왕 구천의 인간적 특성을 그의 생긴 모습에 빗대어 표현한 듯하다.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패해 항복한 후, 스스로 부차의 신하가 돼 마구간 청소를 하고 심지어는 부차의 똥을 맛보기까지 하는 치욕을 견뎠다. 풀려난 후 장작 위에서 자고 쓸개를 핥으며(臥薪嘗膽) 복수를 다짐하고, 범려와 문종과 같은 충신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원의 패자가 된다. 그의 사람됨을 간파한 범려는 진작 떠나버렸지만, 남아있던 문종은 결국 토사구팽의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구천은 집념이 강해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모도 감내한다. 어려울 때는 바싹 엎드려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난관을 벗어나지만, 목적을 달성했거나 형편이 좋아지면 고난을 함께했던 사람의 은혜를 잊고 쉽게 교만에 빠진다. 남을 잘 믿지도 않고 가볍게 배신하며 욕심도 많다. 그래서 범려는 ‘환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경오훼형 인간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자신의 강함을 마음껏 휘두른다. 그런 부류를 쉽게 식별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소위 ‘웨이터의 법칙’이다. 나에게는 친절하지만 식당의 웨이터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한 사람은 필시 장경오훼형 인간이다.

    이런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할 때는 고개를 숙이고 다가오지만, 내가 힘이 없어지면 종업원을 대하듯 교만하고 무례하게 표변한다. 보잘것없는 성취에 도취돼 목을 길게 빼고 입을 뾰족이 내밀고 다니는 것이다. 비즈니스 관계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진실한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든 변함없이 동고동락하는 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항상 그럴 수는 없다. 부귀하여 좋은 상황일 때는 따르는 사람이 많고, 빈천하여 어려워지면 벗이 줄어드는 것(富貴多士 貧賤寡友- 사기 맹상군열전)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역경이나 빈천을 이기기보다는 풍요나 부귀를 이기기가 훨씬 힘들다고 한다.

    펩시콜라의 전 CEO 인드라 누이(Indra Nooyi)가 퇴근해 집에 오니 엄마가 우유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보낸다. 그녀는 심부름을 다녀와서 엄마에게 말했다. “난 펩시콜라의 최고 경영자야. 그런 나에게 엄마는 겨우 우유 심부름을 시킨 거야.”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회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집에 들어올 때는, 왕관은 차고에 벗어두고 오렴.”

    성공의 마지막 도전 과제는 왕관을 내려놓아야만 통과할 수 있는 겸손의 관문이다. 온갖 난관을 극복해 뜻한 바 성취를 이뤘다 하더라도 그 오만의 문턱에 걸려 멈추었다면 그것은 미완의 성공이다.

    그래서 ‘겸손은 왕관 없는 존엄(스펜서 킴벌)’이라 한다. 존엄한 성공에 경배하고 싶다.

    허성원(신원국제특허법률 사무소 대표 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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