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⑮ 기술의 상징, 금성사 제품과 추억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냉장고·TV·세탁기… ‘국내 최초’ 가전제품 역사를 쓰다

  • 기사입력 : 2022-05-27 08:08:55
  •   
  • 1970년대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동네상점에서 금성사 마크가 있는 냉장고를 확보해 장사를 하는 것은 은근히 보이지 않는 자랑과 자부심이 있었다. 더 나아가 ‘나는 빽(?)이 있는 장사하는 사람이다’ 정도였다.

    TV를 시청하기 위해서는 옥상에 5~6m 되는 안테나를 설치해야 됐는데 이 안테나가 동네에서 재산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자제품은 대부분 금성사에서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냉장고는 1965년 4월에 생산된 금성사 ‘눈표냉장고’이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 김한용 작가/
    대한민국 최초의 냉장고는 1965년 4월에 생산된 금성사 ‘눈표냉장고’이다./국립아시아문화전당 김한용 작가/

    # 냉장고

    1960년대 중반 이 시기 냉장고를 가진 가정은 별로 많지 않았다. 가정에서 냉장시설 이래야 얼음을 사서 그릇에 놓고 그 그릇 주변에 음식물을 보관하는 정도였다. 1964년 여름, 금성사 구정회 사장 집에서 사용하던 미국산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냉장고를 수리할 만한 전자수리점도 없는 시기라 구정회 사장은 금성사 공장 내 전기담당자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회사 내 기술자 대부분 냉장고를 만져본 경험이 없었다. 공대 출신으로 기술에 능통한 임종염 과장이 경험은 없지만 한 번 수리를 해보겠다고 자청했다. 임 과장은 냉장고를 공장으로 가져가 하나하나 분해를 하면서 철저히 분석했다. 고장난 부품은 새로 만들어 교체를 해 수리를 완료했다.

    이를 계기로 임 과장은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던 것, 빙과점에서 쓰던 냉동기를 구입해 분해하고 재조립하면서 냉장고의 기술원리를 터득했다. 이러한 사실을 구정회 사장으로부터 보고받은 구인회는 금성사와 락희화학이 보유하고 있던 기술을 총동원해 냉장고를 직접 만들 것을 지시한다.

    이런 노력 끝에 1965년 4월 ‘눈표냉장고 제1호 GR-120’이 탄생했다. 의미는 Gold Star Refrigerator 용량 120L의 뜻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가정에도 냉장고는 필수품이 되어갔다. 처음 생산된 냉장고는 2013년 8월 27일 국가등록문화재 제560호로 지정받았다.

    1966년 생산된 제1호 흑백 TV.
    1966년 생산된 제1호 흑백 TV.

    # 흑백 TV

    1961년 말, KBS-TV가 개국됐다. 당시 TV는 미국 제품이 한국에 들어와 할부로 판매하거나, 추첨을 통해 살 수 있을 정도로 귀했다. 금성사는 발빠르게 TV생산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당시 TV는 사치품이고, 전력 부족으로 시청에 어려움도 많았다.

    1964년에는 민영방송인 동양텔레비전이 개국되자 그해 12월, 상공부가 제한된 범위 내 TV 부품 도입을 허가하고 금성사 텔레비전 생산을 허용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1966년 8월,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텔레비전 ‘VD-191’ 이 생산됐다. VD는 진공관식, 191은 19인치 1호 모델을 뜻한다. 너비 64㎝, 길이 31㎝, 높이 64㎝로 무게는 22㎏이다. 당시 가격이 6만800원으로 쌀 30가마 가격이었다. 고가임에도 수요가 많아 은행창구에서 신청을 받아 판매했는데 주문자가 많아 결국 추첨을 통해 판매했다.

    필자의 기억에도 생생하다. 여름이면 큰 방문을 열어 놓고 이웃분들이 마당에 모여 TV 연속극을 보며 함께 웃고, 울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 박치기왕 김일이 나오는 레슬링 시합이 방송되면 도둑도 빈집에 들어가지 않고 레슬링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금성사 최초의 텔레비전 모델은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재 제561-2호로 지정받았다.

    구정회 집 냉장고 수리 계기로 원리 터득
    금성사·락희화학 보유 기술 총동원
    1965년 용량 120L ‘눈표냉장고 1호’ 탄생

    1961년 KBS·1964년 민영방송 개국으로
    1966년 국산 최초 TV ‘VD-191’ 생산
    쌀 30가마 가격에도 주문 많아 추첨 판매

    1969년 주부 일상 바꾼 ‘백조세탁기’ 개발
    물·세탁시간 조절까지 가능해 획기적
    가사활동 벗어난 여성 사회진출 계기도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 중 도로광고에 Gold Star(왼쪽)와 TV 우측 채널조절기 상단에도 금성사 마크와 상표가 선명하게 보인다./이래호/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 중 아버지가 아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 고속도로변을 지나칠 때 ‘Gold Star’ 라는 광고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이래호/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 중 가족이 모여 신발이야기를 하는데 흑백 TV 속에 신발 광고가 나온다. TV 우측에는 ‘Gold Star’ 마크가 선명하게 보인다./이래호/ /이래호/

    # 이란 영화에 등장한 금성사 흑백 TV

    1997년 제작된 ‘천국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서아시아 ‘이란’에서 만든 영화다. 가난한 가정의 남매와 신발을 스토리로 한 주제로 세계영화계의 호평을 받았다. 어느 날 가족이 모여 신발이야기를 하는데 마침 흑백 TV 속에 신발 광고가 나온다. TV 우측에는 Gold Star 마크가 선명하게 보인다.

    또 하나의 장면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 고속도로변을 지나칠 때 Gold Star 라는 광고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에서 만든 전자 제품이 외국영화 소품으로 등장한 것은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정말 흐뭇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1969년 생산된 제1호 백조세탁기./문화재청/
    1969년 생산된 제1호 백조세탁기./문화재청/

    # 금성 백조세탁기

    1969년 5월, 금성사는 대한민국 주부에게 일대 혁신을 가져다 주는 국내 최초로 ‘백조세탁기’를 생산했다. 하이타이 신화를 만든 ‘허신구 평전’에 소개된 백조세탁기는 알루미늄으로 제작됐고, 세탁과 탈수 용량은 1.8㎏이다. 물조절도 4단계로 조절이 가능하고 스프링식 타이머가 부착돼 있어 세탁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가사노동 중 가장 힘들다는 세탁을 사람이 아닌 기계가 대신 해준다는 것은 가사활동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세탁기의 도입으로 주부들의 일상이 바뀌었다. 이로 인해 여성의 사회 진출 계기도 되었다. 2013년 8월 27일에 국가등록문화재 562호로 지정되었다.

    # 인기없는 밀수품 - 선풍기

    금성사에서 라디오를 최초로 개발한 김해수 회고록 ‘아버지의 라디오’ 내용이다. 선풍기를 만들자는 제안에 구인회 회장은 “부채도 아까워서 못사는 우리 국민들이 비싼 선풍기를 사겠느냐. 많이는 만들지 말라” 고 만류했다. 초기에는 가격 때문에 판매가 잘 되지 않았지만 선풍기는 라디오에 비해 재고가 없을 정도로 비교적 잘 팔렸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선풍기는 라디오에 비해 덩치가 크기 때문에 밀수를 하거나 미군 PX부대에서 빼돌리는 것이 쉽지 않아 시중에 밀수품이 많이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금성사 직원들의 추억

    1960년대 이후 산업이 급격하게 발달헸지만 농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대학을 가지 못하고 가정을 위해, 형제자매를 위해 희생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남학생의 경우 취직이 잘되는 기술계통 학교나 상업학교를 진학했고, 여학생의 경우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이나 경리로 취업하는 게 당시에는 인기가 있었다.

    진주를 비롯 서부경남과 마산지역 출신은 부산 금성사로 취업을 많이 했다. 의령, 합천 창녕 등 중부지방 사람들은 대구로 많이 나갔다. 부산에는 금성사, 대구에는 제일모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두 회사는 급여나 근무 여건이 좋아 고등학교 성적이 아주 좋아야만 취업할 수 있었다.

    아들, 딸이 월급을 받아 고향에 보내 드리면 부모는 이 돈을 모아 논과 밭을 많이 구입했다. 땅을 산 사람의 자녀 직장이 대부분 금성사나 제일모직이라는 면사무소 등기 직원의 이야기도 있다.

    두 회사는 근무복만 입고 식당이나 선술집에 가도 외상이 가능했다. 또한 젊은 남녀 직원이 많다 보니 상상을 넘는 연애이야기, 기숙사 러브 스토리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구인회의 한마디> 새로운 것을 만들어라. 힘든 만큼 그 결과는 더 크게 얻을 것이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