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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부자 氣받기- 삼성·LG·효성 창업주 이야기 3부 (20·끝) 럭키, 정유사업 진출… 세계로 날다

[3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세 번 도전 끝에 ‘국내 첫 민간 정유회사’ 꿈 이뤘다

  • 기사입력 : 2022-07-08 08: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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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년 11월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기자회견을 했다. “정부는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를 전남 여수에 건설될 락희화학계열의 호남정유로 결정했습니다.” 1947년 장사를 시작한 지 20년 만에 ‘동동구리무가 석유’가 됐다. 뜬금없는 표현이지만 이 연재를 처음부터 읽어보신 분은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 새로운 일을 찾아라

    1965년 1월, 구인회가 락희화학 구평회 전무와 한성갑 기획부장을 호출해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돼 답답하니 뭐 딴거 해봐야 될 거 아니가. 새로운 것 검토 한 번 해보게나” 라고 했다.

    락희화학은 지금까지 석유화학제품인 플라스틱을 활용한 완제품이나 합성세제를 생산해왔다. 이와 관련해 두 사람은 석유화학산업은 물론 더 나아가 정유공장 설립까지 새로운 사업의 주제로 확정했다.

    당시 전력과 기름 등 에너지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이라 민간인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1962년 설립된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와 1964년 4월에 설립된 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공장이 가동되는 정도였다.

    GS칼텍스 야간 공장 모습.
    GS칼텍스 야간 공장 모습.

    # 정유사업 진출 결심

    정유사업은 자본이 많이 드는 기간산업이다. 멀리 내다보면 반드시 락희화학으로 볼 때 해야만 하는 필요한 사업이었다.

    락희화학이 주로 사용하는 폴리에틸렌을 만들려면 에틸렌이 필요하고 나프타 분해를 해야 한다. 나프타 분해를 하려면 석유정제가 필요하다. 이렇듯 석유와 관련된 사업은 천문학적 자금이 필요해 일반기업은 쉽게 접근할 사안이 아니었다. 에틸렌 같은 중간 원료 생산공장만 할 것인가? 나프타 분해 공장까지 갈 것인가? 아니면 가장 상위 사업인 석유정제까지 갈 것 인가? 고민은 깊어만 갔다. 두 사람의 보고서를 읽은 구인회는 “대붕은 언제나 멀리 보고 높이 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소. 사업 범위를 정유사업으로 설정합시다.”

    1965년 구인회 지시로 새로운 사업 검토
    기존 사업과 연계한 정유사업 진출 결심
    정부에 사업계획서 제출했지만 좌절
    외국서 현금 차관 후 재도전에도 안돼

    1966년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 공모 공고에
    두 번 실패 바탕으로 ‘호남정유’로 신청
    6대1 경쟁률 뚫고 첫 민간 정유사로 선정
    1967년 기공식·‘호남정유주식회사’ 설립

    # 사업계획서 완성, 첫 번째 도전

    이날부터 락희화학 기획 담당은 가칭 ‘한국석유화학공업주식회사’의 이름으로 석유정제에서 나프타 분해, 폴리에틸렌을 비롯 석유화학계열 공장까지 복합 내용의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1965년 가을 이 사업계획서를 경제기획원, 상공부 등 정부 허가기관에 제출했다. 처음 생각한 대로 정부의 반대는 강했다. 가장 큰 이유가 이런 방대한 계획은 연간 매출 30억원 정도의 락희화학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락희의 정유사업이 외부에 보도되고 알려지자 ‘구름 잡는 얘기, 봉이 김선달 한강물 팔아먹는 프로젝트’라고 풍자할 정도로 구인회는 체면을 구겼다.

    그만큼 규모가 엄청난 것이었다.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자금과 관련,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묻자, 락희화학은 외국 차관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했다.

    장 장관이 “외국에서 차관을 얻어 오면 다시 얘기하라”는 한마디에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1966년 2월 구인회는 한국에 투자할 외국 회사를 찾아 출국했다.

    # 두 번째 도전, 반도석유주식회사

    일본 미쓰이 물산과 미국 모빌과의 협상으로 현금 확보를 확신한 후 가칭 ‘반도석유주식회사’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더 정유사업 계획서를 제출했다. 이 시기 국산 자동차도 생산되기 시작해 석유의 수요량이 늘어나고 제2정유공장의 필요성도 부각되고 있었다.

    정유시설은 입지도 매우 중요하다. 원유 공급을 위한 대형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어야 하고 공업용수도 풍부해야 하고 교통도 편리한 곳이어야 한다. 공장 입지 후보로 전남 여수와 충남 비인, 경남 삼천포를 구상했지만 최종적으로 여수 북쪽 삼일면 월내리가 최적지로 선정됐다. 전남 여수를 최종 후보지로 결정한 것은 입지 조건이 우수한 것 외에도 영남지역인 울산에 정유공장이 있고, 대통령이 영남 출신이라 호남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한 것도 작은 이유의 하나였다. 그러나 경제기획원, 상공부 등에 제출한 사업계획서의 반응은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1967년 설립된 호남정유(주)는 1996년 LG정유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5년 LG와 GS로 계열 분리되면서 ‘GS칼텍스’가 되었다. 여수공장 모습./GS칼텍스/
    1967년 설립된 호남정유(주)는 1996년 LG정유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5년 LG와 GS로 계열 분리되면서 ‘GS칼텍스’가 되었다. 여수공장 모습./GS칼텍스/

    # 세 번째 도전, 호남정유 이름으로

    1966년 5월 8일자 신문에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는 공모를 통해 선정한다는 정부 공고가 게재됐다. 두 번의 실패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는 반도석유라는 명칭 대신 호남이라는 지명을 넣어 ‘호남정유’로 바꾸어 신청했다.

    6월 10일 마감 결과 모두 6곳의 대기업이 참여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대기업들이 지명권을 받기 위해 도전장을 낸 것이다.

    ①동방석유- 신격호 롯데그룹 ②삼남석유- 서갑호 판본방직 계열 ③동양석유- 김종희 한국화약 계열 ④삼양석유- 송대순 삼양개발 계열 ⑤한양석유- 김연준 한양재단 계열 ⑥호남정유- 구인회 락희화학 계열이다.

    당시 언론은 호남정유와 한양석유가 유력하다고 평가했다.

    한양석유는 한양대학교 재단이 주축이었고 서울 근교 부동산을 소유한 재력이 넉넉함이 강점이었다. 호남정유는 락희화학이 일찍부터 합성수지와 전기기계를 경영하는 실력이 풍부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기업이라는 능력의 강점이 있었다.

    당시 삼성그룹이 50억원대 매출, 락희는 30억원대 매출 규모였다. 지속성장으로 삼성과 그 격차를 줄이는 중이었다.

    경쟁이 치열하면 소문도 무성해지는 법이다. 언론에서도 여러 가지 확정되지 않은 설들이 나돌기 시작하는 등 대한민국 경제사를 흔드는 큰 사업으로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신문의 해설기사에 제2정유공장의 선정회사를 아는 분은 주무담당자인 황병태 경제기획원 공공차관 과장, 주무부서 장관, 그리고 대통령으로 당시 세 사람 외 하늘과 땅만 안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보안에 덮여 있었다.

    칼텍스와 결합 당시 호남정유(주)의 회사 로고.
    칼텍스와 결합 당시 호남정유(주)의 회사 로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1967년 2월 20일 호남정유 여수공장 기공식 모습./구인회회고록/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1967년 2월 20일 호남정유 여수공장 기공식 모습./구인회회고록/

    # 부인, 그동안 고생 많이 하였소. 고맙소

    1966년 11월 17일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기자회견을 했다. “정부는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를 전남 여수에 건설될 락희화학계열의 호남정유로 결정하였습니다.”

    락희화학은 선정의 기쁨을 뒤로하고 신속하게 후속 처리를 진행해 나아갔다. 1967년 2월 20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여수에서 공장 기공식을 했다. 1967년 5월에는 칼텍스와 합작법인 ‘호남정유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숨가쁘게 진행해오던 공장 설립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구인회는 1967년 7월 합작사인 칼텍스의 초청으로 부부 동반 미국여행을 하는 여유를 가졌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설레이게 하는 법, 예순살의 구인회가 부인과 함께 여행하며 옛이야기도 나누면서 멋쩍은 유머를 남긴다. “부인, 내가 이렇게 잘사는 것은 부인이 두꺼비 상이라 그렇소. 그동안 고생 많이 하였소, 고맙소.”

    1969년 6월 3일 준공식 날 박정희 대통령은 다시 참석해 격려사를 남긴다.

    <구인회의 한마디> 파트너에게 믿음을 주라. 언제나 처음 마음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라.

    이래호(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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