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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1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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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유공자 될까

창원 시민단체, 장군 행적 조사나서 2019년부터 3년째 포상 신청

  • 기사입력 : 2022-08-10 21: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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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1946년 11월 21일 독립신보에 게재된 ‘여류혁명가를 찾아서’ 기사에서 마산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 김명시(金命時·1907~1949) 장군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 장군은 중국에서 목숨을 걸고 항일운동을 했지만, 사회주의 활동 이력과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등의 이유로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창원지역 시민단체인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지난 2018년부터 김 장군에 대한 사진 등 자료와 유족을 확인하고, 더 나아가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하나둘 밝혀내고 있다. 국가보훈처에서도 오는 8·15 광복절에 맞춰 김명시 장군 서훈에 대한 검토 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독립유공자 선정에 기대감을 모으고 있다.

    1932년 조선공산당 재건 혐의로 공판중이던 때의 김명시 장군./민족문제연구소/
    1932년 조선공산당 재건 혐의로 공판중이던 때의 김명시 장군./민족문제연구소/


    마산 동성동 출신 여성 항일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이력·행적 불분명 이유로
    2019년부터 포상신청했지만 제외


    ◇목숨 걸고 독립운동했지만= 김명시 장군은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났다. 1923년 마산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925년 서울 배화여학교에 입학했다. 김 장군은 19세 때 모스크바 공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927년 중국 상해로 파견돼 대만·필리핀·베트남 등지 독립운동가와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기차역, 경찰서 등을 공격해 큰 타격을 줬고, 1932년 귀국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9년 신의주 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화북지역에서 조선의용군 부대 지휘관을 맡아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조선 의용군들은 남자 군인들과 같이 전투에 참여해 항일 운동을 하는 그를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김 장군은 서울로 돌아와 조선부녀총동맹 간부,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을 역임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다. 이후 사회주의 활동가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행적을 감췄다. 그 뒤 1949년 10월 한 언론사가 뜻밖의 김명시 장군 소식을 알렸다. 김 장군은 북로당 정치위원 혐의를 받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부평 경찰서에 구속됐고, 이후 철창 속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김 장군이 젊은 청춘을 바쳐 항일 독립운동을 한 사실은 ‘북로당 정치위원’이라는 직책에 갇혀 지금까지 잊혀 갔다.

    김명시 장군
    김명시 장군


    현재 북한정부 수립 기여 여부 쟁점
    시민단체, 자료 보완해 재신청
    광복절 맞춰 서훈 결과 발표 기대


    ◇‘독립운동가’지만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그간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가 소극적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역사학계에서 관련 연구를 시작했지만 부족한 자료 탓에 조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 201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보도된 언론사 기사들에 대한 접근성이 높이지면서 관련 연구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또한 영화·연극 등 미디어를 통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에 맞춰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지역출신 독립운동가인 김명시 장군의 재조명과 독립유공자 선정을 추진하고 나섰다. 김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은 2019년부터 3년째 이어지고 있다. 희망연대는 2019년 1월 최초로 포상 신청을 했지만, 그해 11월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심사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어 지난해 7월 자료를 보완해 2차 신청을 했지만 한 달 만에 같은 이유로 불가 통지를 받았다. 하지만 추가 자료를 보완해 또 재신청했고, 보훈처가 이를 받아들여 현재까지 심의가 진행되고 있다. 김 장군에 대한 서훈의 주요 쟁점은 사망 당시 ‘북로당 정치위원’ 직책을 가졌던 김 장군이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했는지 여부다.

    이와 관련 희망연대는 그동안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찾아 나섰고, 그 결과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신미리애국열사릉’에 김 장군의 이름이 없고, 1991년 국토통일원당 창립대회보고서 명단에도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은 “김명시 장군이 북로당 정치위원이라고 당시 우리 정부가 발표했는데 정치위원이란 직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김 장군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면 북한에서 왜 김 장군을 언급 안 했겠는가”라며 “김 장군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실하다고 생각해 오는 8·15를 계기로 독립유공자 포상 명단에 분명히 들어갈 것이라 믿는다. 선정되면 선양사업을 준비할 생각이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에 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현재 김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선정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다”며 “다만, 발표 전까지는 자세한 조사과정은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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