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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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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농가월령가 9월령의 계절- 윤영미(서예가)

  • 기사입력 : 2022-10-17 19: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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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NS에는 온통 지역마다 축제 사진들로 넘쳐난다. 그동안 코로나 19라는 긴 절대 감금의 시절을 보낸 터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축제 소식은 역병의 종식처럼 반갑기까지 했다. 그리고 더불어 추수의 소식들로 내 핸드폰은 온통 노랗거나 감색과 귤색으로 물이 든다. 집 앞 들녘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파릇파릇했던 것이 누렇게 되더니 얼마 전부터 추수가 시작되었다. 들판에 추수기 시작되면 농가월령가 9월령이 떠오른다. 농가월령가는 조선 24대 헌종 때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지은 글이다. 1월부터 12월까지 우리의 세시풍속과 농사와 관련된 글이 당시 서민들의 일상으로 아주 정감 있게 담겨 있다.

    ‘구월이라 계추되니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 기러기 언제 왔는가. 벽공에 우는 소리 찬 이슬 재촉한다. 만산에 풍엽은 연지를 물들이고, 울 밑에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 구월 구일 가절이라 화전하여 천신하세. 절서를 따라가며 추원보본 잊지 마소. 물색은 좋거니와 추수가 시급하다. 들마당 집 마당에 개상에 탯돌이라. 습한 논은 베어 깔고 마른 논은 베두드려 오늘은 점근벼요 내일은 사발벼라. 밀따리 대추벼와 동트기 경상벼라. 들에는 조 피 더미 집 근처 콩팥가리 벼 타작 마친 뒤에 틈나거든 두드리세. 비단 차조 이부꾸리 매눈이콩 황부대를 이삭으로 먼저 잘라 후씨로 따로 두소. 젊은이는 태질이요 계집 사람 낫질이라. 아이는 소 몰리고, 늙은이는 섬 욱이기. 이웃집 울력하여 제 일 하듯 하는 것이 낟알 줍기 짚 널기와 마당 끝에 키질하기. 한쪽에서 면화 트니 씨아소리 요란하다. 틀 차려 기름 짜기 이웃끼리 힘 모으세. 등불 기름도 하려니와 음식도 맛이 나네. 밤에는 방아 찧어 밥쌀을 마련할 제 찬 서리 긴긴밤에 우는 아기 돌아볼까. 타작 점심 하오리라 닭고기 막걸리 부족할까. 새우젓 계란찌개 상찬으로 차려 놓고 배춧국 무나물에 고춧잎장아찌라. 큰 가마에 앉힌 밥이 태반이나 부족하다. 한가을 흔할 적에 나그네도 대접하나니. 한 동네 이웃하여 같은 들에 농사하니, 수고도 나눠하고 없는 것도 서로 도와 이때를 만났으니 즐기기도 같이 하세. 아무리 일 많으나 일하는 소 보살펴라. 핏대에 살을 찌워 제 공을 갚을지라.’

    결실의 계절에 추수하는 기쁨과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정을 들여다보면 그동안 차단되어 있던 내 주변이 보였고 소박한 음식에도 늘 행복해졌다. 내가 사는 이곳은 바닷가 도시라 들녘에 결실만큼이나 가을 제철을 맞은 해산물로 9월령을 짓기에도 충분하다. 사람 사는 곳에는 계절이 있고, 세월이 있고, 삶이 있다.

    농가의 구월에는 집마다 풍요로운 가을 타작이 시작되었고 몹시 소란스러운 마을 전경이 있었다. 조, 피, 콩, 팥을 두드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닭고기와 막걸리가 노동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새우젓, 계란찌개, 배춧국과 무나물, 고춧잎장아찌가 식욕을 자극한다. 사람만큼이나 수고로웠을 소를 돌보는 손길에 애정이 묻어났다. 돌아보니 우리 집 처마 밑에도 제비 빈 둥지만 남아있고, 출사 여행하는 사진작가들의 카메라에 떼 기러기가 찍혔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 꺾고, 한가롭게 남산을 바라본다”라 읊은 중국의 도연명도 사랑했었다.

    내가 사는 도심 속 농촌 풍경은 고요한 가을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가 농부였던 그 시절과 달리 이웃은 학교로 출근하는 선생님과 사업을 하는 젊은 부부와 이사를 와서도 한번 본 적 없어 어디로 출근하는지조차 모르는 담장이 높은 이웃도 있다. 주택가 앞 넓은 전원에 고향을 떠났던 늙은 농부의 아들만이 콤바인을 운전하며 긴 논을 오고 간다. 잠시 한눈을 팔다 다시 창을 내다보면 어느새 가득했던 가을에 빈 들녘만 남아있다.

    서예가의 바람은 고운 한글 흘림체로 12폭 병풍에 농가월령가를 쓰고는 바뀌는 절기마다 인정을 기억하고 싶다.

    윤영미(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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