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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조선의 개혁을 주창한 정암 조광조

  • 기사입력 : 2022-12-16 08: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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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 재 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사주명리·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mail : ju4614@naver.com)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조선전기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 손이며, 할아버지는 조충손(趙衷孫)이고,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조원강(趙元綱)이다. 조광조는 성리학(일명 주자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으며, 도학(주자학의 별칭)정치에 대한 주창을 했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사림파와 대립한 훈구파 중 홍경주, 남곤, 심정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조광조를 무고하도록 했으며,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치게 해 반정(反正)의 의심을 사게 했다. ‘주초위왕’이란 주(走)와 초(肖)를 붙이면 조(趙)가 되니 ‘조광조가 반란을 꿈꾼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결국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은 훈구파에 의해 축출, 사사됐으며 기묘년에 참혹한 화를 입었던 일이라 하여 ‘기묘사화’라 한다. 조광조는 훗날 선조 초 신원(伸寃·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1605년(선조 38) 그의 묘소 인근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고, 전국에 향사(享祀)를 봉행했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심곡서원은 조선 중기 중종 대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효종 원년(1650)에 설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효종이 ‘심곡’이라는 현판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해 사액서원이 됐다. 서원을 두르고 있는 병풍산이 주산(뒷산)으로 외부로부터의 바람과 살기(殺氣), 및 미세먼지를 잘 막아주고 있으며 서원 앞 구불구불한 도로는 서원의 지기(地氣)가 새지 않게끔 하고 있다.

    서원의 가장 큰 특징은 입구의 홍살문과 외삼문·강당·내삼문·사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직선 배치는 외부의 흉풍(凶風)이 사당까지 바로 때리기 때문에 꺼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심곡서원의 경우는 주산의 생기를 품은 용맥(龍脈·산줄기)이 사당에서 외삼문까지 닿으므로 이상적인 배치라 할 수 있다.

    서원 내부의 기운을 세세히 보면 강당이 파워스팟(명당길지)이며 그 주변은 최소 무해지지(無害之地·보통의 터)는 된다. 또한 강당을 기준으로 사당이 주산이 되고, 동(거인)재와 서(유의)재가 좌청룡(좌측 산)·우백호(우측 산)가 되며 연지와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외청룡(좌측 바깥 산)이 되고, 산앙재가 외백호(우측 바깥 산)이며 외삼문이 안산(앞산)이 되어 혈(穴)인 강당을 보호하게끔 돼있어 기찬 배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연지 옆의 500년 된 느티나무가 강당의 터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노거수(老巨樹·수령이 많고 커다란 나무)는 주변 터가 좋음을 암시해준다.

    심곡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47개 서원·사당 중의 하나다. 심곡서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조광조 묘는 주산인 ‘응봉’의 생기로운 산줄기 하나가 뻗어 내린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선조 때 조성되어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부인 한산이씨와의 합장묘이다. 물형(物形)으로는 날개를 펼친 매가 먹이를 찾기 위해 땅 위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응봉형(鷹峯形)’이다.

    묘역 내에는 대리석 묘표, 혼유석, 상석이 각 1개씩 있고 문인석과 망주석이 한 쌍씩 있는데, 이들은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방향이나 땅 기운이 약한 곳에 세워져 있다.

    이러한 석물(石物·무덤 앞에 세운 돌로 만들어 놓은 물건)들은 비보물(裨補物)로 예부터 무덤가에 설치를 한다. 조광조 묘 아래에 부모·조부모·증조부모의 합장묘가 나란히 있다.

    합장을 한 이유는 생기(生氣)를 최대로 얻기 위함이며 역장(逆葬·조상 묘 윗자리에 자손의 묘를 씀)을 한 것은 당시엔 서민은 꺼렸지만 사대부 집은 자손이 조상보다 벼슬이 높으면 더 위에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혈처(穴處)는 ‘매의 눈’이 있는 곳으로 조광조 묘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그렇다 해도 조광조와 조상 묘가 있는 곳은 해가 없는 무해지지 상급임은 분명하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사주명리·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mail : ju46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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