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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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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새해 첫날 아침- 이병문(사천남해하동 본부장)

  • 기사입력 : 2023-01-02 19:3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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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바다는 푸르다 못해 검다. 시간과 공간이 멈춘 터널이자 늪이다. 멍 때리기엔 그만이다. 라디오 소리마저 소음, 길섶에 차를 세웠다. 물비늘이 반짝이는 바다와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하늘은 이어지다 끊어지기를 되풀이한다.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 유일한 훼방꾼이다.

    2022년 12월 31일 오후 4시, 해가 산 허리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넘어가고 있다.

    고향에 발을 디뎠다. 30년 만이다. 곧 어둠이 바다와 산을 모두 삼킬 게다. 고개 한 번 돌렸을 뿐인데, 벌써 30년이라니.

    결혼 후 회사를 그만두고 내 일을 시작했다. 잘 나간 시기는 아주 잠깐. 손대는 것마다 깡통이었다. 나를 설명할 용기조차 없어 아내의 마음을 할퀴고, 손찌검까지 했다. 야반도주하듯 한국을 떴다.

    경제적으론 성공했지만 그녀는 없다. 도망갈 때 부끄러움은 어디 갔는지, ‘한번 만나고 싶다’는 이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살아 있기는 할까? 재혼을 했을까? 시작된 질문은 거미줄 뽑듯 줄을 이으면서 염치없게도 양심을 꽁꽁 묶고 말았다.

    귀국 한 달 전인가, 약국을 하는 친구를 통해 그녀를 수소문했다.

    내가 떠난 뒤 그녀는 서울로 갔고 한참 후 어린 딸이 있는 나이 든 남자와 재혼했다고 한다. 친구 누나가 우연히 절에서 봤다는 말도 붙였다.

    친구 전화를 받던 날,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누나와 같이 다니던 절’이라는 말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절을 찾아서 한 번만 만나도록 해 달라고 또 손을 내밀었다.

    운 좋게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겨우 설득했으나 기대는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말도 붙였다. 딸아이는 시집갔고, 재혼한 남편은 먼 길을 떠났다고 했다.

    푸른 빛이 산 너머로 고개를 다시 내밀고, 밤새 시꺼먼 물을 모두 마셔버린 바다가 작은 불덩이를 서서히 뱉기 시작하는 내일 아침이면 그녀를 만날지 모른다. 처음 만났던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체육복을 입고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초등생을 지도하던 순수했던 그때의 전 아내를.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손찌검과 폭언에 대해 잘못했다고 사과해야지. 사업 실패, 남편으로서 의무를 하지 않은 것 등 당시엔 계산된 행동이었지만, 도리를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고 용서를 구해야겠지. 힘들 때 가까이 있지 못한 것, 매사에 진실로 대하지 않은 부분까지.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많이 후회했으며 남은 삶은 과거를 반성하면서 살고 싶다고.

    들뜬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그새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멀리 등대의 불빛이 안내판이 된다. 발 끝에 물이 일렁인다. 놀라 걸음을 멈추는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새해 첫날부터 무슨 잠꼬대를 그리 하요. 해가 중천인데. 일출 보러 가자고 하더니….”

    연초부터 개꿈이나…. 올해도 일출은 글렀다.

    하긴 소동파 조차 인생을 ‘어디로 날아갔는지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기러기가 우연히 진흙 위에 남겨 놓은 발자국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인생무상이다.

    이병문(사천남해하동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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