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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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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이순신 연구가 서홍교 작가

“끝나지 않은 이순신 이야기… 장군의 행적 입체적으로 조명할 것”
2012년 사천해전 현장 벚꽃 구경 연구 계기
2016년 남해로 이사오면서 관심 더욱 커져

  • 기사입력 : 2023-03-08 21: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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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해군 고현면 ‘이순신순국공원’에 있는 첨망대에 오르면 그의 ‘길지 않은’ 삶(54년)을 마감한 현장 관음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7년의 전란을 견딘 그가 한 놈의 왜구라도 살려서 돌려보낼 수 없다는 충정에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독전하다 적의 총탄에 맞아 영원한 안식을 취한 곳.

    책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순신의 7년 전쟁’을 쓴 서홍교(62) 작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며 첨망대를 소개했다. 집필 1년 동안 수도 없이 이곳을 찾았단다. “이곳에 서면 가슴이 먹먹해진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가볍게 산 자신이 부끄럽고 너무나 미안하다”는 말도 보탰다. 취재 내내 표정은 비장했고, 첨망대에선 한발 물러서거나 비켜섰다. 나올 땐 고개를 한참이나 떨궜다.

    서홍교 작가가 ‘이순신순국공원’에 있는 첨망대에서 자신의 저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순신의 7년 전쟁’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홍교 작가가 ‘이순신순국공원’에 있는 첨망대에서 자신의 저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순신의 7년 전쟁’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벚꽃 관광

    2012년 사천 선진리성 벚꽃 구경이 계기가 됐다.

    “모두 벚꽃에 취해 있었다. 노래자랑, 관광상품 판매 부스 등 왁자지껄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곳은 임진왜란 때 ‘시마즈 요시히로’라는 왜군 장수가 주둔했던 왜성이었고, 이순신 장군 2차 출전의 첫 전투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던 사천해전 현장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조명군총’이 있는데, 조선과 명나라 군사가 1만명 가까이 죽어 한꺼번에 묻힌 곳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서 작가는 “회사 동료 등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반성이 출발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2016년 사천, 이어 순천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남해로 식구들이 이사하면서 관심은 더 깊어졌다. 퇴직 전 공로연수 기간, 연구에 매달렸다.

    ◇역사 공부

    충무공을 ‘성웅’이라고 표현했다. 임진·정유 양란 중에 원균 무리와 선조, 명나라 수군의 끝없는 모함과 멸시, 핍박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바친 분, 성웅을 대체할 언어는 없다고 했다.

    공부 방법을 묻자 그는 “막막했지만 뒤져보니 인프라가 너무 잘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 자료는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를 통해 원문과 번역본까지 제약 없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스스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기 좀 어렵다고 했다. “‘난중일기’, 장계 기록인 ‘임진장초’, 편지 등 본인의 기록과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등 나라의 기록, 그 밖에도 ‘난중잡록’, ‘징비록’ 등 임진왜란을 함께 겪은 사람들의 기록에도 장군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조금만 노력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 작가는 “전적지 등 현장 방문은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면서 “이 부분은 앞으로 많이 보완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천 선진리성·조명군총, 남해 선소왜성·충렬사·순국공원 등지와 순천 순천왜성, 장도 등은 찾았다. 통영 한산도, 목포 고하도, 전라우수영이 있었던 강진도 다녀왔다. 아산 현충사도 빠지지 않았다. 서 작가는 “중건 공사 중이라 방문하지 못했던 여수의 좌수영 진남관 등을 시간 나는 대로 탐방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16살 어린 아랫사람에 사과

    공부의 목적은 성웅 바로 알기다. 1596년 2월 왜군의 제주도 침공을 우려한 조정에서 총책임자인 체찰사 이원익을 통해 장군에게 ‘전라우수영의 수군을 제주도와 진도를 방어하도록 전라우수영으로 돌려보내라’는 공문을 보냈다.

    장군은 곧바로 지시가 부당하다고 답신한다. 그런데 다음날 우수사 이억기가 “날도 풀렸으니 조속히 체찰사의 명을 따르겠다”고 찾아왔다. 화가 치민 장군은 우수영 관리들에게 곤장을 쳤고,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흘 후 장군은 송희립을 보내 자신의 지나침을 사과했고, 이억기도 이해한다고 답했다. 충무공은 사과 이틀 후 새벽 3시에 배를 띄워 이억기의 진영을 직접 방문해 술로 위로했다. 직책이 높고 나이도 16살 많았지만 직접 방문하여 술까지 권했다.

    ◇여자문제는 오해?

    여진과 귀지가 있다. 여진은 체찰사 이원익과 순시할 때 일기에 나온다. 여진이 여진족을 일컫는 말인지, 사람 이름인지 알 수 없다. 작가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일러두기를 통해 “지어낸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여진과의 남녀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당시 일기를 보자.

    “1596년 9월 12일, 바람이 세게 불고 비도 많이 내림. 늦게 출발하였다. 10리쯤 가니 냇가에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이야기하였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도 왔다. 저물 무렵 무장에 도착했다. 여진(女眞)/9월 13일, 맑음. 이중익과 이광축이 함께 왔기에 이야기했다. 이중익이 매우 궁색하다는 말을 많이 하기에 옷을 벗어주고 종일 이야기했다./9월 14일, 맑음.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9월 15일, 맑음. 체찰사가 무장현에 도착하여 들어가 절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여진(女眞).”

    실명의 여인이지만 관계에 대해서는 한 줄도 언급이 없다.

    또 다른 여자 귀지. 광주 목사 최철견의 딸 귀지가 아버지를 뵈러 와서 잤다는 기록이다. “1596년 9월 17일, 바람이 세게 불고 비도 많이 내림. 이날 아침 광주 목사 최철견에게 가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이어 술이 나와 밥은 먹지 않고 술에 취했다. 광주 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오후에 능성 현령 이계령이 들어와 창고를 봉하면서 체찰사가 광주 목사를 파면시켰다고 했다. 최철견의 딸 귀지가 와서 잤다.”

    ◇끝나지 않은 전쟁

    “왜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는 우문에 서 작가는 “현재도 왜곡된 역사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거나 우리 후손들이 모르는 것이 많으니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431년 전, 이순신 장군이 싸웠던 왜구, 지금의 일본과 싸움은 더 복잡하고 교묘해져서 지금은 적의 정체를 알기 힘든 경우도 많다고 했다.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장군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의외의 에피소드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했다. 또 “장군의 기록 전체를 타임라인에 따라 재배치하고 관련된 선조실록의 기록도 넣어서, 장군의 행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싶어 현재 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순국제전→승전기념제 개칭을

    서 작가는 “사천 선진리 등 국내 왜성 꼭대기 천수각 터에 장군의 동상을 세워 역사 교육과 일본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사용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남해군에 ‘이순신순국공원’이 있고, 2년마다 ‘이순신순국제전’을 거행하고 있는데, 순국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행사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방문객 유치도 힘들다”면서 “명칭은 ‘노량해전 승전 기념공원’으로, 행사는 ‘노량해전 승전기념제’로 바꾸어 숭고한 죽음을 기리면서도 축제로서 승전을 기려야 국민이 공감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글·사진=이병문 기자 bmw@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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