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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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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이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 유골이라도 찾았으면”

[진주 보도연맹 유해발굴 현장]
명석면 야산 희생자 매장 추정지서
유족 40여명 숙연하게 시삽 지켜봐

  • 기사입력 : 2023-03-22 20: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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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한 분 한 분 모든 유골이 남김없이 후손들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보우하고 도와주십시오. ”

    22일 오후 진주시 명석면사무소에서 열린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해발굴 개토제. 제례상 앞에서 3살 때 아버지를 여읜 진주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유족 하상천(77·진주시 수곡면)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축문을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자 일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날 개토제 사회를 맡은 정연조 한국전쟁전후진주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장(진주유족회장)은 20여분간 이어진 개토제 뒤 진실화해위원회 관계자들과 진실규명 현황에 대한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한국전쟁 발발 70여년이 흘러 어느덧 백발이 된 유족 40여명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로 화답했다. 유족들은 초조한 듯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는가 하면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바쁘게 수첩에 메모했다.

    제례를 마친 뒤 유족과 참가자들은 곧장 유해 매장 추정지로 향했다. 명석면사무소에서 500m가량 떨어진 명석면 관지리 야산 입구에 다다르자 경사가 가파른 약 2m 너비의 산길이 나타났다. 매장 추정지로 오르는 흙길은 가파른 데다 중간중간 소나무가 쓰러져 있고 마른 단풍잎이 쌓여 있어 미끄러웠다. 일부 유족과 참가자들은 지팡이를 짚고 겨우 목적지에 다다랐다. 진실화해위가 약 50구 정도 희생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이라 보고 있는 곳이다.

    22일 진주 명석면사무소에서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해 발굴 개토제가 열리고 있다.
    22일 진주 명석면사무소에서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유해 발굴 개토제가 열리고 있다.
    개토제 후 희생자 유족들이 유해 매장 추정지를 둘러보고 있다./성승건 기자/
    개토제 후 희생자 유족들이 유해 매장 추정지를 둘러보고 있다./성승건 기자/

    유족 김상열(76)씨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4살 때 아버지를 잃은 김씨는 “죄 없이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며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담담히 말했다. 유족들은 이번 유해 발굴이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으로까지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추정지에서 시삽을 마친 정연조 진주유족회장은 “정부의 공식 사과도 없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며 “가해자는 사과하고 피해자는 포용해 이제는 이념 전쟁 그만하고 늦었지만, 화합과 통합의 길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유해 매장 추정지에서 만난 시민 이혜원(진주시 가좌동)씨는 “뉴스를 통해 이 사건을 접하고 직접 현장을 보고 싶어 왔다”며 “우리나라가 과거를 정리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희생자들의 명예를 되찾는 문제뿐만 아니라 학살자들도 이젠 나와서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거나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된 민간인 등이 군경에 의해 집단 살해당한 사례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관련 진상규명 신청은 139건(군경에 의한 희생 130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2건, 기타 7건)이 접수됐다. 진실화해위는 이 중 109건을 조사 중이다. 지난해 11월에는 회의를 통해 1차 진실규명 7건을 마쳤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한국전쟁 당시 진주에서 민간인들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법적 근거와 절차 없이 집단학살한 행위를 불법으로 보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공식 사과와 유해발굴·안치 등 후속 사업 추진을 권고했다.

    이번 발굴은 2009년 1기 진실화해위에 이어 14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시행됐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민간인들이 70년이 넘도록 땅에 묻혀 가족의 품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앞서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의 발굴은 지방자치단체와 민간단체의 주도로 진행된 바 있다. 2014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서 유해 39구, 2017년에는 38구를 발굴했고 2021년에는 관지리 화령골에서 유해 16구를 수습했다. 지난해 집현면 봉강리에서는 유해 35구가 발굴됐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개토제를 시작으로 올 상반기까지 유해발굴을 마친다는 계획이다. 임나혁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 담당 전문위원은 이날 “현장에서 유해와 유품이 발굴되면 오염물을 제거하고 건조한 뒤 개체 수나 상흔 등을 분석해 최종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진실화해위는 4월에서 5월 사이 2차 진실규명을 시작해 순차적으로 빠른 시일 내 규명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박준혁 기자·김태형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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