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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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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979) 수비이송(樹碑而頌)

- 비석을 세워서 칭송하다

  • 기사입력 : 2023-05-09 08: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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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방한학연구원장

    진주에서 출발해서 대전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20분쯤 달리다 보면 단성(丹城) 출입구가 나온다. 그 출입구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산 밑에 여러 채의 기와집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배산서원(培山書院)이다.

    1587년 경상도 유림들이 신안(新安)의 구산(邱山)에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 선생의 사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배산서원의 시초이다. 1792년에 이르러 배산에 배산서원을 지어 청향당(淸香堂)을 향사(享祀)하고, 그 조카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그러다가 1868년에 이르러 훼철당했다.

    1923년 청향당의 후손 진암(眞庵) 이병헌(李炳憲) 선생이 다시 배산서당(培山書堂)을 지었다. 그 안에 문묘(文廟)를 세워 공자(孔子)를 모셨다.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공묘(孔廟)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모사해 와서 모셨다. 그 아래 도동사(道東祠)를 짓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청향당을 봉안(奉安)하고, 죽각을 종향으로 모셨다.

    우리나라에서 성균관이나 향교 이외에 서원에서 공자를 모신 유일한 곳이다. 유교를 새롭게 하기 위해 유교를 종교화한 공자교(孔子敎) 운동의 한국 본산(本山)이었다. 퇴계·남명 두 선생을 성인(聖人)급으로 승격하여 이자(李子), 조자(曺子)라고 위패를 모셨다.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을 동시에 모신 서원도 전국에서 유일하다. 오랫동안 배산서당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다시 옛날 서원의 이름을 회복하여 배산서원으로 부른다.

    지난 5월 7일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유림, 지역인사, 후손 등 500여 명이 모여 배산서원 옆에서 수비(樹碑) 고유제 및 개막식을 장엄하게 거행하였다.

    청향당은 퇴계·남명 두 선생과 동갑으로 두 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어 그 학덕이 높았다. 죽각은 퇴계·남명의 뛰어난 제자였다. 청향당의 조부 황해도 관찰사 이계통(李季通) 공이 배양에 처음으로 자리 잡았으니, 지금부터 600년 가까이 되었다.

    배산의 입향조 이계통 공과 그 손자 청향당, 청향당의 조카 죽각, 청향당의 후손 진암, 죽각의 9대 종손(宗孫) 만은(晩隱) 이상보(李尙輔) 공 등의 비석을 한 자리에 세웠다.

    비석을 세우는 것은 양반 자랑이나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옛날 뛰어난 학덕을 칭송해 후세 사람들이 배워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3년여 동안 코로나가 심하게 유행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를 못 했다. 그동안 서원이나 향교에서 행사를 할 수 없었으니, 코로나의 피해를 가장 크게 받았다. 500여 명 운집한 유림들 속에서 유림의 기운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느꼈다.

    옛날 것만 회복하자는 것이 유림활동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학문과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윤리 도덕을 회복하자는 것이 유림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樹 : 세울 수. *碑 : 비석 비.

    *而 : 말 이을 이. *頌 : 기릴 송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원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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