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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형평(衡平) 100년- 이상권(서울본부장)

  • 기사입력 : 2023-05-10 19: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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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정은 예수도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 잡는 백정이 부처님을 믿겄나? 내 장인이 동학을 믿게 된 것은 그렇지, 예수도 부처도 받아주지는 않은께,(중략) 내가 수모를 당하는 것은 견딜만 했지마는 내 계집 새끼들이 당할 적엔 피가 끓더마.”(박경리 ‘토지’) 고려시대 일반 농민층이던 백정(白丁)은 조선시대에는 도살업자라는 천역(賤役) 신분으로 분류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론 신분제가 철폐됐다. 하지만 뿌리 깊은 악습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백정은 사는 곳부터 제한했다. 호적에 오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혼인은 백정끼리만 가능했다. 결혼할 때 말이나 가마를 못 타고, 죽은 뒤에도 상여를 못 쓰는 것이 당시 법도로 여겼다. 일제강점기에도 호적에 붉은 글씨로 ‘도한(屠漢)’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멸시와 차별이 이어진 최하층민이었다.

    ▼1923년 4월 진주에서 백정 신분 차별에 맞선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양반도 가세한 ‘형평사(衡平社)’란 조직이 탄생했다. ‘형평’은 백정이 사용하던 저울이다. ‘저울(衡)처럼 공평(平)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대한다”고 외쳤다. 당시로는 상상도 못 했던 신분 차별을 타파하자는 민주사회를 향한 발로였다. 세계인권선언(1948년)보다 25년이나 앞섰다.

    ▼올해로 형평운동 100년이다. 하지만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는 형평사의 외침이 무색하다. 극심한 경제적 불균형에 따른 양극화로 현대판 계급사회가 굳어졌다. 빈부의 대물림은 속칭 ‘금수저’, ‘흙수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한 줌 권력이라도 손아귀에 거머쥐면 갑질이 난무하고 분수를 망각한 행태도 공공연하다. 공평과 상식을 갈망하는 ‘형평’의 가치는 100년이 지나도 유효한 현실이다.

    이상권(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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