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03일 (일)
전체메뉴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997) 절식순국(絶食殉國)

- 먹을 것을 끊어서 나라를 위해서 죽다

  • 기사입력 : 2023-09-26 08:09:32
  •   
  • 동방한학연구원장

    옛날부터 각종 이유로 먹는 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뜻을 밝히거나 주장을 관철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요즈음에는 주로 단식(斷食)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지만, 중국에서는 아예 단식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주로 절식(絶食)이 쓰이고, 절곡(絶穀), 절립(絶粒)이라는 말도 썼다. 도교(道敎)에서는 수련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안 먹는데, 그 것은 주로 벽곡(穀)이라고 했다. 곡식을 물리친다는 말이다. 그 밖에 병곡(屛穀)이라는 말도 썼는데, 역시 곡식을 물리친다는 말이다.

    요즈음은 주로 정치가들이 자기의 주장을 내걸고 항의의 표시로 하는 단식이 대부분이다. 별로 절실하지 않을 때 단식을 한다면 도리어 단식의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역사상 가장 거룩한 단식은, 조선 말기 학자이자 문신인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 1842~1910) 선생이 24일 동안 단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11세손으로 경북 예안현(禮安縣 : 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하계(下溪) 마을에서 태어났다. 24세 되던 186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여러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에까지 이르렀다.

    1882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5년 왜놈들이 왕비를 살해하자, 의병장이 되어 왜적 토벌에 나섰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결국 대한제국이 망하자,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로 음식을 끊고 나라의 운명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향산의 아들 기암(起巖) 이중업(李中業)이 향산의 묘갈명(墓碣銘)을 전라도 장성(長城)에 사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을 찾아가 받았다. 송사는 퇴계 선생의 학문과 후손 향산의 절의는 한 가지 뿌리라는 것을 부각하여 이렇게 첫머리를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가 융성하였을 때는 퇴도(退陶 : 퇴계) 선생이 도학(道學)으로써 잘 다스려지는 시대의 문명(文明)의 운세를 열었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는 향산 선생이 절의(節義)로써 만대에 전해질 윤리의 소중함을 붙들었다. 무릇 도학과 절의는 길은 달라도 지향하는 바는 하나며, 일은 달라도 효과는 같다. 그러니 두 가지 모두 천지 사이에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 두 어른께서 우리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내려 준 은덕을 받게 해 주셨다.’

    진정한 학문을 하면 절의가 생기고, 진정하게 절의를 지키는 사람은 학문에 바탕을 두어야 가능하다. 나라가 망했을 때, 서울의 고관대작들 가운데는, 나라는 생각지 않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일본이 주는 관작을 받고, 일본 천황이 주는 은사금(恩賜金)이라는 거금을 받고 기뻐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향산 선생은 조선왕조가 힘을 기울여 배양한 선비답게 스스로 절의를 지켜 국가와 운명을 같이했다.

    * 絶 : 끊을 절. * 食 : 먹을 식.

    * 殉 : 위해서 죽을 순. * 國 : 나라 국.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원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