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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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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껍질 벗기- 우광미 수필가(202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 기사입력 : 2023-12-07 1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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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한(歲寒)의 계절에는 추사의 세한도가 먼저 떠오른다. 나지막한 초가 한 채와 천지를 버티고 선 송백 네 그루. 한기와 결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소나무의 한 갈래는 이미 고사하고, 한 갈래는 굽이치며 벋은 끄트머리에 겨우 잎이 살아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건 힘겹게 둥치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다. 거칠고 듬성듬성하고 두터운 껍질에는 무수한 세한의 시간과 함께 아픔이 엉기어 있다.

    대개 나무는 한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올 무렵에 껍질을 벗는다. 모과나 배롱나무처럼 일시에 벗겨져 새 껍질이 나오는 종류도 있다. 이런 경우는 겉이 매끈하고 색깔도 고르다. 반면 소나무나 참나무처럼 지속적으로 껍질이 밖으로 밀려 나오면서 교체되는 종류는 겉이 거칠고 틈이 벌어져 독특한 문양을 이룬다. 그렇지만 생태가 다르지는 않다. 껍질이 벗겨 나가거나 조금씩 틈을 벌려주지 않으면 나무가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전통적으로 문학도들은 속앓이를 한다. 등단의 문이 훨씬 좁던 시절부터 신춘문예를 향한 각양의 열정이 그것이라 했다. 글쓰기의 엄중함을 알고 난 뒤에는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어려워졌다. 때론 앞서는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는 솜씨에 주춤거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누군가의 평가를 의식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의 초조함은 되돌아 나갈 길을 생각하기도 했다.

    길을 모르면 우선 멈춰 서서 살피라고 했던가. 집 근처 개울과 산을 산책하면서 제각각으로 자라는 나무가 새삼스러웠다. 푸른 소나무에서 하얀 게거품처럼 진이 흐른다. 나름의 상처이기도 하다. 부딪히거나 찍혀서 손상되면 안에서 나오는 진액으로 진피를 보존하여 나무를 살린다. 껍질은 밖으로부터 해충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딱딱하게 굳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제 몫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체는 끊임없는 변화와 지속의 길항작용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살아온 나무는 그 나름의 무게를 가진다. 마을 어귀의 당산목을 존중하거나, 요지에 있는 노거수를 피해서 도로를 갈라서 내는 것도 나무가 살아낸 생명력에 대한 사람들의 예우일 것이다. 한길을 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도중에 만나는 갈등과 좌절도 자신을 담금질하는 과정이다. 이를 묵묵히 견뎌낸다면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된다. 풍상을 견뎌낸 나무의 껍질은 나에게 깊은 성찰을 가르쳐 준 무언의 오브제이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대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한 해의 결과물로 자신을 돌아보니 더욱 그렇다. 서랍 속에 발표하지 못한 글들도 껍질을 벗기 위한 노력의 결과일지 모른다. 글 쓰는 일이 삶의 과정이자 그 흔적일진대, 우열과 성패를 앞세울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한때의 실용성이나 외부의 평가가 꼭 가치를 결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무의 껍질이 목질과 진피의 삶을 살아온 실체이듯, 소중한 일은 이미 스스로 가치를 내재한 것이 아닐까.

    우광미 수필가(202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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