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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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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을 빛낸 경남의 거장들] (1) 박생광

朴 거장의 붓놀림 生 다하는 날까지 光 … 오방색 담았다, 강렬함 빛나다

  • 기사입력 : 2024-01-15 2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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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문화예술 꽃피운 ‘한국 채색화 거장’… 1985년 타계
    1949년 문총 진주지부 결성… 전국 첫 종합예술제도 열어
    ‘금산사의 추녀’·‘고루도’·‘부귀모란도’ 등 미술관에 소장


    경남미술 거장들의 보석 같은 작품들이 지면에서 빛납니다. 경남신문과 경남도립미술관의 공동기획 ‘한국미술을 빛낸 경남의 거장들’을 시작합니다. 경남은 역사적으로 유독 유명한 미술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경남미술의 거장이 곧 한국미술의 거장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도립미술관 학예사 7명 모두가 참여해 2주에 한 번 여러분을 거장들의 삶과 작품세계 속으로 안내할 예정입니다. 작가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연재물이지만, 결과적으로 경남미술사 전반을 정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박생광’이라는 작가명을 들었을 때, 우리는 보통 오방색을 활용한 한국 채색화의 거장을 떠올리게 된다. 단청이나 고구려 고분벽화, 탱화, 민화 등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원색(감청(紺靑), 주(朱), 황(黃) 등)을 사용한 대표 작품들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 대부분이 그의 나이 팔순에 다다른 1980년대에 제작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팔순의 나이임에도 작품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제작에 몰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작가 박생광의 전성기이자 황금기를 1980년대라고 평가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 전반을 생각해 볼 때 문화예술에 대한 박생광의 열정이 뜨거웠던 시기는 1945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박생광은 예술전반에 대한 관심이 컸는데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해방 이후 일본 적산가옥을 소유하게 된 박생광은 1층에 전시가 가능한 다방을 운영했다. 이곳은 ‘진주문화건설대’(이하 문건)가 주도적으로 사용하면서 진주의 신문화 건설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이 다방은 문건이 주도한다고 ‘문건다방’으로, 전시를 하는 곳이라 ‘화랑다방’으로 불렸으며, 두 이름을 합쳐 ‘문건화랑’이라 칭하기도 했다. 박생광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1949년 이용준, 이경순, 오제봉, 설창수, 박세제 등과 함께 진주에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진주지부를 결성하고 전국 최초의 종합예술제인 ‘영남예술제’를 개최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진주에서 영남예술제를 꾸준히 개최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예술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행사는 지금도 ‘개천예술제’라는 이름으로 개최되고 있다.

    금산사의 추녀, 1983년, 종이에 색, 136x137㎝
    금산사의 추녀, 1983년, 종이에 색, 136x137㎝
    부귀모란도, 1983년, 종이에 색, 132.5x37.5㎝
    부귀모란도, 1983년, 종이에 색, 132.5x37.5㎝

    1954년 5월. 진주 대안동 박생광의 집에 손님이 찾아온다. 박생광은 그를 자신의 집에 한 달 간 살도록 해주었으며 심지어 영남미술제의 중요 거점 중 하나였던 카타리나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도록 도와준다. 그는 다른 아닌 이중섭이었다. 이중섭은 2년 간의 통영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가기 전 1954년 5월 한 달 동안 박생광의 집에 머물면서 진주 카나리아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전시되었던 작품 ‘진주 붉은 소’는 최열 선생이 그의 책 ‘이중섭 평전’에서 “20세기 가장 빼어난 걸작”, “진주처럼 영롱한 보석”이라 평가했다. 즉 이중섭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진주에서 그려졌고, 그 장소가 진주 대안동 박생광의 집이었던 것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해방과 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생광은 문화예술을 통해 시민의식을 고양하겠다는 신념을 성실히 실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비봉풍경, 1943년, 비단에 색, 47x67㎝
    비봉풍경, 1943년, 비단에 색, 47x67㎝
    한라산 일출봉, 1974년, 종이에 먹·색, 64x82㎝
    한라산 일출봉, 1974년, 종이에 먹·색, 64x82㎝
    고루도, 1950년대, 종이에 먹·색, 34x44㎝./5개 작품 모두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고루도, 1950년대, 종이에 먹·색, 34x44㎝./5개 작품 모두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문화예술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거의 활동가 수준의 행보를 하면서도 작가로서의 활동도 쉬지 않았다. 1960년대 박생광은 ‘모란을 잘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다. 1966년 4월 마산 제일다방에서 개최된 ‘박생광 동양화전’에는 화조 10곡 병풍, 어해 10곡 병풍, 모란 6곡 병풍 외 모란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이 출품됐다. 사실 그가 모란을 열심히 그렸던 이유는 당시 모란이 잘 팔리는 그림의 소재였기 때문이다. 작품을 팔아야 생활이 가능했던 그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란 외에도 풍경화도 곧잘 그렸는데 촉석루도 그 소재 중 하나였다. 경남도립미술관에 소장된 ‘고루도’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기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 자체로 매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처음 언급했던 박생광 스타일을 대표하는 그림 중 하나다. ‘금산사의 추녀’는 강렬한 원색과 뚜렷한 주황색 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금산사의 기와 문양과 십장생의 학이 그림의 장식적 배경이 되고, 과거 미인도에 등장한 인물이 각색되어 주인공으로 자리잡고 있다. ‘금산사의 추녀’가 완성되고 얼마 후인 1985년 박생광은 서울 수유동 자택에서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박생광은 죽음의 순간도 전성기였다.

    (김재환 경남도립미술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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