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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0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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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유산 읽기] (2) 김해 대성동 고분군

역사 속 잠든, 베일 속 묻힌… 가야를 속속 들여다보다

  • 기사입력 : 2024-01-18 21: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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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야. 태동 때부터 신비의 베일 속에 싸인 나라였다. 역사가들이 가장 애먹는 나라이기도 하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가 동시대에 존재했지만 우리는 그 시기를 4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가장 큰 이유는 가야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지 못했고, 국가의 생성소멸 과정을 문자기록으로 남기지도 못 했기 때문이다. 결국 주변국의 단편적인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에 의존하여 추론할 수밖에 없는 게 가야사의 실체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이곳에는 주민들을 위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김홍섭 소설가/
    김해 대성동 고분군. 이곳에는 주민들을 위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김홍섭 소설가/


    둥글게 반원으로 솟은 고분군
    3~6세기 유구·유물 다량 출토
    번영했던 금관가야의 옛터 증명

    태동 때부터 신비에 싸인 가야
    국가 생성소멸 과정 문자기록 없어
    고고학적 발굴 등에 의존해 추론


    ◇기원의 구분, 역사의 시작

    둥글게 반원으로 솟은 무덤을 보고 있으면 묘한 생각이 든다. 사람이 태어날 때의 흔적은 없다. 그런데 죽음은 흔적을 남긴다. 죽음을 형상화하고 추념하는 건 인간뿐이다. 압도적으로 기억하는 죽음이 있다. 지구의 역사를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어 놓았던 예수의 탄생. 그의 죽음은 지구상 23억 인구가 기억하고 추념한다. 기원 전후 세계사의 대변곡점이 있었다. 기원전 200여 년쯤에 동서양에 새로운 대제국이 탄생하는데,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하고 기원후로 넘어오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의 전성기 팍스로마나 시대를 연다. 그즈음 중국에서는 전국 칠웅 중 하나였던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평정하고 최초의 통일 제국을 세웠지만 불과 15년 만에 진나라는 붕괴된다. 그다음 한나라가 들어서지만 이마저도 서기 8년에 국가 문을 닫는다. 이 시기에 로마는 눈엣가시였던 청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하지만 그 사건은 예수가 전하던 ‘주님의 말씀’을 전 세계가 받아들이는 기폭제였다. 그즈음, 동방의 좁은 땅에서는 작은 실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성동 고분군 항공사진.
    대성동 고분군 항공사진.

    ◇6개로 나뉜 연맹국가의 실험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3국이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며 국가로서의 모양을 갖추어 갈 무렵, 가야는 난생신화를 바탕으로 국가의 기둥을 세운다. 그런데 태동기 때부터 왕이 6명이다. 가야의 건국신화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구지봉에 오른 아홉 촌장이 군주를 보내달라고 하늘에 간청하고, 하늘은 구지가를 가르쳐 부르게 한다는 얘기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거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이른바 구지가다. 하늘에서 상자가 내려오고 여섯 개의 알이 담겨 있고 열흘 후에는 여섯 명의 청년으로 변했다는 얘기. 그 여섯 명이 각각 여섯 개의 가야를 맡아 지배하며 가야연맹을 결성했고 맏형인 김수로가 김해를 중심으로 금관가야의 왕이 되고 6가야의 맹주가 된다는 얘기. 난생신화는 고구려나 신라에도 있으니 특별할 것은 없다. 신화일 뿐이니 팩트 체크하는 건 바보짓이다.

    대성동 고분을 지키고 있는 노거수.
    대성동 고분을 지키고 있는 노거수.

    ◇느슨한 연맹이지만 강력한 자원의 뒷받침

    어째서 가야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지 않고 6가야의 연맹이라는 느슨한 국가형태를 지향했느냐는 것이다. 느슨한 연맹이라고는 하지만 초기 가야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강한 면모를 보였다. 김해를 비롯한 경남지역은 풍족한 곡창지대이자 철광산 집약지대다. 가야는 ‘철의 왕국’이다. 가야의 철기 문화는 삼국 역사상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덩이쇠라고 부르는 철정이라는 게 있었다. 가운데가 잘록하고 양쪽 끝에 이르면서 폭이 넓어지는 간단한 모양의 쇠판인데 가야가 있었던 지금의 경남지역에서 일본이나 중국으로 수출되어 화폐 같은 결제수단으로도 쓰였고 제련을 통해 다양한 물품을 만들어냈다. 일본은 철과 제련기술자 공급을 전적으로 가야에 의존했다. 가야는 풍요로운 곡식과 철을 바탕으로 비약적 발전이 가능했다.

    비옥한 곡창지대를 품에 안고 무기와 갑옷, 공산품 등 철을 떡 주무르듯 다루던 가야는 당시 신라나 백제도 몸을 사리던 국가였다. 신라의 탈해이사금 21년인 서기77년에는 황산진(黃山津) 어귀에서 신라와 분쟁이 벌어지고 94년에는 가야연맹군이 마두성(馬頭城, 현 양산시 물금읍)을 함락할 정도였다. 96년에도 가야군과 신라군의 분쟁이 벌어졌다. 115년에는 신라군이 가야연맹을 침공했다가 다시 황산하(黃山河, 현 낙동강)에서 대참패하고 물러났다. 231년에는 감로국이 신라에 병합되고 가야는 철 공급권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로부터 병력을 수입하고 신라를 공격했다. 가야는 당시 철을 기반으로 중국(한사군 포함), 일본의 소국들, 마한, 동예, 신라를 제외한 진한의 소국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신라는 4세기 중반까지 가야에 밀렸다.

    가야 말 장식구./김해 대성고분박물관/
    가야 말 장식구./김해 대성고분박물관/
    대성동 고분 출토 목걸이./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대성동 고분 출토 목걸이./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가야 신라와 혈연이었던 흉노

    4세기라면 중국북방에서는 서기 304년 흉노의 후손인 유연이 한(漢)을 세운다. 그리고 310년 유연의 아들 유총은 서진을 멸망시켰다. 역사상 이 시기 흉노(匈奴)·갈( )·선비( )·저( )·강(羌)의 5개 변방민족을 5호라고 하며 이들이 세운 13국과 한족이 세운 3국을 ‘5호16국’이라고 한다는 건 다들 학생 때 진저리치며 외웠을 것이다. 4세기의 중국은 바로 이들의 역사다.

    흉노는 신라나 가야와도 인연이 깊다. 신라 김알지 계통도 흉노족이라고 문무왕 비문에 기록되어 있지만, 김수로 계통도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김일제를 중국 고대의 신화에 등장하는 삼황오제 중 오제(五帝)의 한 명인 소호 금천(金天)씨의 후손으로 기록한다. 그야말로 중국고대 전설의 인물이니, 이쯤 되면 아시아지역 김씨 성을 가진 모든 이들은 소호 금천씨의 후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하나. 팩트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비슷한 시기 로마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칙령을 내려 시민들이 크리스트교를 믿는 것을 허용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아다리 전투에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나가라는 꿈속의 계시를 받고 그대로 따라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기 392년에는 아예 국교로 선포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청년 예수를 매달았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죄 사함’의 축복을 구하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대성동고분박물관 전경.
    대성동고분박물관 전경.

    ◇흉노족과 훈족 그리고 로마의 멸망

    이 무렵 유럽에 훈족이라는 강력한 부족국가가 등장한다. 훈족을 이끄는 인물은 칭기즈칸을 제외하고 세계사에서 가장 강력한 유목민 지도자로 꼽히는 아틸라다. 게르만족 중 하나인 서고트족은 4세기에 훈족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했고 훗날 세계사에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기록된다. 이 문제는 결국 직접적으로 로마를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훈족에게 밀려 유럽으로 쫓겨 온 서고트족, 롬바르드족, 반달족 등의 침략으로 쇠진해가던 서로마는 결국 476년에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친위대장이었던 서고트족 출신 오도아케르에게 강제 퇴위당하며 멸망한다.

    동로마제국이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그리스정교를 바탕으로 한 비잔틴(비잔티움)제국으로 불렸고 결정적으로 영토에 로마가 없었다. 또한 로마의 언어였던 라틴어를 쓰지 않았고 그리스어를 썼으며 그리스인이 다스렸다. 따라서 서로마의 멸망은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의 멸망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로마의 멸망은 훈족의 강력한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훈족의 전신이 바로 김수로 왕의 계통인 김일제의 흉노족이라는 데는 사학계에서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인다.


    비옥한 곡창지대를 품에 안고
    철을 떡 주무르듯 다뤘지만
    느슨한 연맹으로 쇠락의 길

    고분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가야가 중앙집권 국가 세웠다면
    삼국시대 역사는 달라졌으리라고…


    ◇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의 쇠락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3~6세기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금관가야(金官加耶)의 번영한 옛터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때문에 구야국(狗倻國) 또는 금관가야의 국가적인 성장 과정이나 그 특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청동솥과 같은 북방계 유물이나 방격규구신경과 같은 중국제 위세품은 한군현(漢郡縣)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고분군에서는 덧널무덤의 규모가 대형화되고 철제무기류, 갑옷류, 마구류들이 다량으로 죽은 이와 함께 매장된 것을 보여준다. 특히 나라 밖에서 이입된 의기적(儀器的)인 장식적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는 낙랑군(樂浪郡) 소멸 이후 김해지역이 북방민족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4세기말 고구려와 전투에서 판판이 깨지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던 신라에 불만이 많았다. 백제는 금관가야, 왜국이 연합하여 신라와 한판 붙는다. 연합군은 서라벌 남쪽의 남천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뒤 신라의 서라벌까지 함락한다. 거기까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군이 들이닥치자 백제와 가야와 왜국 연합군은 궤멸당한다. 결국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구야국을 패망시키고 전기 가야연맹은 와해된다. 금관가야는 옛 김해만과 낙동강 유역의 지배권을 상실했으며 고령지방의 대가야가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잡는다.

    가야고분 발굴조사 현장./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가야고분 발굴조사 현장./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신비의 베일에 가린 인물 허황옥

    금관가야 하면 허황옥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허황옥도 신비에 가려진 인물이다. 수로왕을 만나러 인도 아유타국에서 현재의 김해 땅까지 배를 타고 왔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행로다. 무려 2000년 전에 무슨 배를 타고 왔으며, 언어는 통했는지, 이름은 왜 인도식이 아닌 허황옥인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데 단신으로 와서 결혼한다는 것도 수수께끼다. 설화라지만 사실로 기록된다. 그러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일설에는 인도 ‘아요디아(Ayodhya)’ 지방이 아유타국이라고도 하며 또 다른 연구자는 인도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 전쟁에서 패하고 배를 타고 중국 사천 쪽으로 들어갔다가 김해로 왔을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이쯤에서 가볍게 유추해볼 만한 것은, 허황옥이 실제 인도에서 왔는지보다, 인도에서 전해진 가야불교의 전래설에 허황옥이라는 인물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이면서 여여정사 주지인 도명스님이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불교가 허황옥을 통해 인도에서 가야로 전해졌음을 그의 저서 ‘가야불교, 빗장을 열다’에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는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때 전진의 승려 순도가 불상과 경전을 고구려에 전하면서 들어왔다고 공인된 불교보다 324년이나 앞선다. 그렇다면 가야불교가 인도에서 바닷길을 통해 다이렉트로 전해졌든 다른 루트로 우회했든, 중요한 것은 인도불교를 가야가 직수입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가? 허황옥 일행이. 평범한 일반인들에겐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모든 국가는 다민족 다문화국가다

    한 가지 상상은 해볼 만하다. 흉노의 후손과 인도계 여성이 결혼했다면 금관가야는 시작부터가 다문화국가다. 요즘 우리사회에 다문화가정이 늘면서 그들을 불편하게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런 시각은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택도 없는’ 말씀. 수천 년 전부터 말갈, 흉노, 돌궐 같은 북아시아 민족들과 피가 섞였고, 동아시아나 남아시아 인종들과도 섞였다. 동서양의 모든 국가들은 고대부터 땅따먹기로 주변 민족들과 유전인자가 용광로 쇳물처럼 녹아들어 뒤섞였다. 단언하건대 단일민족 국가는 존재치 않는다. 로마의 멸망도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한때 로마가 게르만족을 포함한 다양한 이민족을 품었다가 그들에 의해 몰락했다지만,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 모든 인종의 유전자와 문화가 섞인 하나의 다문화공동체로서 현대의 이탈리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 인구소멸 시대의 우리는 다문화가정과 이민자들에게 수용적 자세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대성동 고분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국가는 역시 선택과 집중이다. 가야가 풍부한 곡창과 철 제련 능력을 가지고 중앙집권체제의 국가를 세웠다면 삼국시대 역사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고대 한반도를 지배하는 통일가야제국을 상상하는 것은 저 고분 속에 잠들어 있는 모두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김홍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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