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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2월 2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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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을 빛낸 경남의 거장들] (3) 양달석

시대의 소음 넘어… 삶과 애환을 그리다
거제 출신 화가… 18세부터 본격 활동
‘낙원’ ‘소와 목동’ ‘잠시’ 등 다양한 작품

  • 기사입력 : 2024-02-12 2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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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거제 출신의 화가 양달석은 1908년에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경험하며 살았던 예술가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를 여읜 후부터는 목동생활로 삶을 영위하다 매형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18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꾸준히 부산 경남 일대에서 화업을 이어가며 조선미술전람회에 4회 입선, 동경독립미술전 2회 입선, 부산미술전람회 최고상,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부산시 문화상, 경상남도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고 한국전쟁 당시는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시대적 굴곡 속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던 그가 어떠한 사연으로 점차 일체의 외부 활동을 접고 작업에만 몰두하는 외로운 예술가가 되었을까? 순탄하지 못한 시대 속에서 전업화가, 그리고 일곱 식구의 가장으로서 살아온 여산의 삶은 어땠을까?

    ▲잠시, 1957년, 군용막사천에 유채, 112x156.5cm, 동의대학교 석당기념관 소장
    ▲잠시, 1957년, 군용막사천에 유채, 112x156.5cm, 동의대학교 석당기념관 소장
    ▲낙원, 1963년, 종이에 수채, 42x64cm, 개인소장
    ▲낙원, 1963년, 종이에 수채, 42x64cm, 개인소장
    ▲소와 목동, 1960년대 추정, 캔버스에 유채, 52.5x72cm, 개인소장.
    ▲소와 목동, 1960년대 추정, 캔버스에 유채, 52.5x72cm, 개인소장.

    여산의 예술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읽어내려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변화한 화풍과 그 이면을 살펴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여느 화가들이 그렇겠지만, 양달석 역시 인생의 중요한 몇 번의 변곡점에서 화풍이 확연히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개인적 경험과 시대의 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듯하다. 즉,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과 달리 목동과 머슴 생활로 삶을 영위하던 때에 경험했던 그리움과 위안, 젊고 힘들었던 시절 세상의 빛을 얼마 보지도 못한 채 떠난 두 아들, 모진 고문과 권력의 핍박, 늘 곁을 지켜준 아내와 자식들. 이 모든 그의 개인적 경험들은 고스란히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다.

    작품 ‘소와 목동’, ‘낙원’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와 목동, 낙원과 동심의 세계, 동화와 민요화가 등 여산을 대표했던 이러한 단어들은 그의 작품 속 조형미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되뇌었던 ‘여산(黎山)’의 의미를 떠올리며 그의 작품을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여산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여산’은 양달석 화백의 호다. ‘동이 트기 전 새벽녘의 희뿌옇고 어슴푸레한 산’이라는 작가 자신의 설명은 그의 생과 시대적 배경, 나아가 그가 그토록 작품 속에 담고자 했던 가치들을 통해 다시금 그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 여산의 초기 작품들은 어두운 사회 속 한 예술가의 저항 의식이 느껴진다. 회색빛의 어둡고 애잔한 분위기가 감도는 농촌 풍경, 힘겹게 살아내고 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 서민들의 생활상은 당시 사람들의 고단하고 척박했던 삶을 짐작게 한다. 특히 ‘나무꾼’에서 보이는 무표정한 농민의 얼굴 모습에서는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이러한 여산의 사실적인,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가 그득 담겨있는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여산이 암울한 시대 속 예술가로서의 저항 의식을 담아 사회 고발적 작품들을 제작해 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해방이여!, 1947년, 캔버스에 유채, 71.5x59.5㎝, 개인소장
    ▲해방이여!, 1947년, 캔버스에 유채, 71.5x59.5㎝, 개인소장
    ▲나무꾼,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70.5x50.5㎝,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나무꾼,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70.5x50.5㎝, 경남도립미술관 소장.

    해방 이후, 여산은 오히려 그러한 서민들의 삶에서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담아내고자 했던 듯하다. 1947년 작 ‘해방이여!’, 1957년 작 ‘잠시’ 등은 그러한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작품들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당시의 서민들을 통해, 당시의 삶의 모습을 통해, 결국 그는 다가올 새 시대로의 희망, 긍정적인 가능성, 새로운 유토피아를 가득 담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예술로써 시대를 은유하고 새 희망을 꿈꾸던 양달석의 삶에 큰 변곡점이 찾아왔다.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커져갈 즈음 갖가지 오해와 근거 없는 추측들은 그를 빨갱이 화가로 몰아버렸고 이후 그는 여러 차례 경찰에 붙들려갔다. 이유도 모른 채 매를 맞아야 했고, 임신한 아내까지 잡혀가 고문을 당했던 일화들은 암울했던 시대 아래 억울하고 힘들었던 수많은 삶들을 대변한다. 이후 여산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와 목동 시리즈로 이어진다. 그렇게 그의 작품에는 밝고 동화적인 화풍만 드러나게 된다.

    이렇듯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이어오면서도 다양한 시대의 소음들을 자신의 예술 곳곳에 표현해 낸 양달석의 삶과 예술은 우리의 아픈 역사 속 한 예술가의 깊은 고뇌를 짐작게 한다. 푸른 색감이 감도는 생활 풍경, 강한 에너지를 지닌 농민들의 모습, 어두운 시대 속 힘들었던 서민들의 모습, 고통 없는 낙원 속에서 뛰노는 소와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은유했던 또 다른 의미들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그의 화풍과 숨겨진 은유들은 안타까운 사회 현실에 대한 작가의 시선,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회적 바람과 이를 진정으로 표현해 내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가 가득 담겨 있다.

    그토록 되뇌었던 새벽녘의 희뿌연 내일의 희망처럼, 희미하지만 분명히 다가올 내일의 희망처럼, 광복을 소망하는 식민시대 아래 서민들의 마음처럼,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모두의 소망처럼, 그는 암울한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세상에로의 염원을 끊임없이 표현해 내고 있다.

    (박지영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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