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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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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비문증(飛蚊症)-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 기사입력 : 2024-05-13 19: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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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추흰나비 한 쌍이 청명한 봄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다닌다. 한 달 전쯤 붉은 꽃망울이 하염없이 떨어지던 동백나무 근처에서 맴돌다 이팝나무 위로 올라가 하얀 쌀밥처럼 꼭꼭 앉는다. 한 쌍은 날개를 고이 접고서 잠시 미동이 없다. 오랜 여정이 힘겨워 보인다. 언뜻 서로의 날개를 어루만지며 더운 숨결로 위로하는 듯 보인다. 앞날개에 검은 점이 짙은 배추흰나비가 문득, 내 푸른 스무 살 언저리 자취방으로 데려다준다.

    없는 살림에 막내를 억지로 서울로 보낸 어머니는 그 당시 12시간은 족히 걸리던 완행기차를 타고 불쑥 내 자취방에 오시곤 했다. 촌놈이 학교는 제대로 다니는지, 끼니는 거르지 않는지, 빨래나 제대로 하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경상도 식으로 그냥 아무 연락 없이 막 들이닥쳤다. 한참 성장기였던 나는 짐짓 불편하기도 했다. 하긴 연락할 방법은 자취방 주인집 전화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편지도 며칠씩이나 걸리고, 전보는 아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취방 가득 묵은 빨래들이 널려 있다. 나는 방안을 대각선으로 지른 비닐 끈 밑으로 고개 숙여 들어간다. 방이 두 배로 넓어졌다. 하릴없이 푸른곰팡이 꽃만 피우던 시절. 당신은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옷을 갈아입고 씻을 동안 아무 말 없이 사과를 깎고 있던 당신. 사과 껍질보다 더 수북이 쌓여가는 한숨들. 그 온기는 아직 불 넣지 않아 차가운 방을 데우고, 잘 마르지 않는 빨래도 금방 말려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잠든다. 꿈속에서 비눗방울들이 무수히 날아다닌다. 눈이 퉁퉁 부은 아침, 당신은 어제 입었던 내 옷을 또 찬물에 헹구고 있다.

    그 시절, ‘시창작실습’ 수업시간에 ‘방’이라는 제목으로 낸 필자의 졸시 한 편이다. 그때는 몰랐다. 세상의 모든 자식처럼 어머니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 더 젊은 나이에 주무시는 동안 그만 먼 길을 떠나셨다. 그 애절한 모습이 오늘 내 두 눈에 배추흰나비가 되어 스며들고 말았다.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를 앓았다. 서울에서 주기적으로 고향을 찾으면 잠시 나를 알아보기도 하다가, 이내 ‘선생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고향을 다녀가면 늘 무거운 짐이 내 어깨를 짓누르곤 했다. 나는 아버지의 그 순한 눈망울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지금은 실눈을 뜨고 가만히 이팝나무 위에 앉아 편안히 쉬고 있다.

    한쪽 다리를 절며 느리게 어두워지는 골목. 당신은 알았을까. 그날이 마지막 배웅이었던 것을, 목발도 없이 큰길까지 걸어 나왔을까. 나는 탱자나무 가시에 자꾸 눈이 찔렸다. 골목 끝에서 어정쩡 돌아서면 언제나 맞바람이 불어왔다. 공사 중인 용두교 지나 멀리 영남루까지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길을 따라서 걸었다. 남천강 검푸른 물속에 집이 한 채 있다. 녹색 새마을 모자 쓴 당신이 한쪽 귀에 연필 꽂고 용마루를 올리는 중이다. 당신을 부른다. 입춘이 지났는데 아직 강물이 차다고 말했다. 당신은 손사래를 치며 여기는 니가 살 집이 아니다, 아니다. 같은 말을 반복한다. 단디 가래이 단디 가래이.

    이십 년 전 즈음에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필자의 ‘입춘’이라는 제목의 졸시다. 지금 나는 그 모진 서울을 떠나 고향에 산다. 부모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다. 가끔은 오늘처럼 배추흰나비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좀 더 가치 있게 사는 게 무엇인지 자문한다.

    5월은 화려한 꽃 잔치보다 부모와 스승을 생각하기 좋은 계절이다. 비문증은 우리나라 사람 열 명 중 예닐곱은 경험하는 흔한 증상이다. 그저 나이 들면 먼지처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눈앞에 아스라이 떠다닌다. 지독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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