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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교육100년]개화기(2)-진주중안초등학교

  • 기사입력 : 1999-11-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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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중안초등학교는 전국에서 두 번째, 도내에서는 최초로 개교한 근대
    학교이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학교이다.
     중안초등은 처음 개교한 이래 학교이름을 11번이나 바뀔 만큼 우리나라
    의 교육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1895년 7월 고종황제의 교육조서반포와 소학교령에 따라 1895년 9월 관찰
    부(현재 도청) 소재지인 진주에 경상우도(右道)소학교(현 중안초등학교의
    전신)가 설립됐다. 관찰부 회의실을 학교로 활용했으며 10여명의 학생이 입
    학했다. 그러나 단발령이 내려져 의병이 봉기해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함에
    따라 개교 2개월여만인 11월 휴교됐다.

     1896년 1월 진주성내5동(뒤에 진주우편취급소가 들어선 곳) 관찰부 관리
    대기소를 교실로 개조해 교명을 진주공립소학교로 변경, 재개교했다. 학생
    수는 20여명이었으며 교원은 교관인 윤대희와 부교관인 황병규 2명이었다.
     1902년 1월20일 진주성내 매동 매월당(梅月堂) 터(현재 임진대첩 계사순
    의단의 자리)에 대지 1천780평 건평 193평의 일자한옥 5칸의 학교건물을 지
    어 이전했다. 학교 운동장은 현재 촉석루 인근에 있었던 진주공원이었다.
     1906년 8월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계획을 추진시키기 위해 소학
    교령을 보통학교령으로 개정, 9월1일 공립진주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게 됐
    다. 이때 6학급으로 운영됐던 공립진주보통학교에 최초로 일본인 교사 다께
    가사(武笠貞幹)가 부임했다. 1907년 4월1일 후루이찌(古市橋之助)가 교감으
    로, 같은해 9월1일 한국인 이준호가 교장으로 각각 발령받았다.

     이 학교에 여자학급을 설치한 것은 1909년4월1일. 한국 최초의 초등교육
    기관인 서울 교동초등학교 보다 무려 16년이 빨라 전국 최초의 남녀공학이
    었다. 수업연한은 남학생보다 1년 짧은 3년제였다.
     여자학급이 개설됐으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 풍습으로 교실 하
    나에 남녀학생이 함께 수업할 수 없어 따로 수업했다. 소위 2부제 수업을
    한 것이다. 다음해 진주 갑부 김기태씨의 협찬(당시 공사비 800원)으로 여
    학생 교실을 건립, 1910년 11월2일 완공돼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게 됐다.
     학급 개설 당시 여학생 6명이 입학했으나 3명이 중도 탈락하고 1912년 3
    월23일 이현자(李賢子) 허충희(許忠姬) 최경구(崔瓊球) 3명만 남아 졸업했
    다.

     지난 96년 5월 「진주중안백년청사」를 발간, 중안초등학교의 역사를 집
    대성한 류태주교장은 『당시 유교사상이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있어 남녀가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며 『특히 보수성이 강한
    진주에서 남녀공학이 제일 먼저 시작됐다는 것은 진주지역 주민들의 교육
    에 대한 깊은 관심과 높은 열성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안초등의 첫졸업생을 배출한 때는 1910년 3월31일. 당시 공립진주보통
    학교에서 남학생 14명이 처음으로 졸업했다.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 공포로 11월1일 진주공립보통학교로 개명되고
    일제는 명목상 앉혀놓았던 이준호교장을 밀어내고 11월11일 일본인 이노우
    에를 교장으로 앉혀 식민지 교육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6학급 250여
    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았으며 교장과 군복을 입고 칼을 찬 7명의 훈도(교
    사)가 근무했다. 일본어를 보급하기 위해 일본어시간을 전체 수업시간의 3
    분의 1 이상을 배당, 노골적인 제국신민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1914년 현 중안초등학교 소재지인 진주시 인사동 1-25(당시 중안동 조산
    가(造山街))로 학교를 이전했으며 이곳에 본관 8개교실의 신축공사가 완공
    된 것은 1918년이었다.
     1919년 5월 진주제1공립보통학교로 개명됐으며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이 공포돼 남학생은 4년에서 6년으로, 여학생은 3년에서 4년과 5년을 거쳐
    6년으로 연장돼 현재의 학제대로 개편됐다.

     1920년 이후부터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로 바꿈으로써 진주제1공립보통학교는 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학급이 13학급으로 늘어났다.
     1941년 대륙침략을 위한 국민연성(國民鍊成)과 황국신민화교육 전시체제
    교육으로 전환하기 위해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해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정함에 따라 42년 3월1일 왜색이 짙은 진주길야(吉野)국민학교로 개칭했
    다.
     국어상용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으며 우리말을 빼앗고 창
    씨개명과 신사참배, 봉안전건립과 동방요배(東方遙拜)등을 종교화해 황국신
    민의 얼심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게다가 교육과정 중 목검체조, 분열식 행군, 수기신호, 도강훈련, 전쟁놀
    이 등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끼거나 양말을 신지 못
    하게 하고 반바지만 입게하는 등 강인한 심신단련을 통해 침략전쟁의 총알
    받이로 기르는데 혈안이 됐었다.
     또 근로봉사라는 명분을 내세워 어린 학생들의 노동력까지 착취했다.
     특히 일제는 진주길야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14살 안팎의 어린 6학년 여
    학생들을 정신대로 끌고가 희생물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중안초등학교에 보관된 당시의 학적부를 보면 수십명의 여학생들이 정신
    대에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진주길야국민학교의 학생들이 정신대의 희생물로, 근로봉사활동으로 번돈
    과 국방헌금으로 「吉野號」 전투기 한대를 헌납할 정도로 노동력을 착취당
    했다.
     해방후 1945년 9월24일 진주중안공립국민학교로 개명이 바뀌난 이후 같은
    해 12월24일 금성공립국민학교, 46년 9월15일 천전공립국민학교, 62년 3월2
    일 봉원국민학교, 70년 3월1일 봉곡국민학교, 81년 3월1일 촉석국민학교
    등 인근 5개교에 학급을 분리시켰다.
     6·25 전쟁이 발발했던 50년 8월 본관과 강당, 신관교사가 파괴되었으
    며, 11월17일 학교 운동장에서 지뢰가 폭발해 임시휴교되는 등 고난을 겪었
    지만 60여차례에 걸쳐 경남도·진주시 연구·시범학교로 지정, 운영하는
    등 경남교육의 중심학교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지난 2월 현재 까지 99회
    졸업생 2만5천여명을 배출했다./이대승·조윤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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