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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7월 2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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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교육100년](3)-진주중안초등학교(하)

  • 기사입력 : 1999-11-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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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년 현 중안초등학교 소재지인 진주시 인사동 1-25(당시 중안동 조산
    가(造山街))로 학교를 이전했으며 이곳에 본관 8개교실의 신축공사가 완공
    된 것은 1918년이었다.
     1919년 5월 진주제1공립보통학교로 개명됐으며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이 공포돼 남학생은 4년에서 6년으로, 여학생은 3년에서 4년과 5년을 거쳐
    6년으로 연장돼 현재의 학제대로 개편됐다.

     1920년 이후부터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로 바꿈으로써 진주제1공립보통학교는 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학급이 13학급으로 늘어났다.
     1941년 대륙침략을 위한 국민연성(國民鍊成)과 황국신민화교육 전시체제
    교육으로 전환하기 위해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해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정함에 따라 42년 3월1일 왜색이 짙은 진주길야(吉野)국민학교로 개칭했
    다.

     국어상용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으며 우리말을 빼앗고 창
    씨개명과 신사참배, 봉안전건립과 동방요배(東方遙拜)등을 종교화해 황국신
    민의 얼심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게다가 교육과정 중 목검체조, 분열식 행군, 수기신호, 도강훈련, 전쟁놀
    이 등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끼거나 양말을 신지 못
    하게 하고 반바지만 입게하는 등 강인한 심신단련을 통해 침략전쟁의 총알
    받이로 기르는데 혈안이 됐었다.
     또 근로봉사라는 명분을 내세워 어린 학생들의 노동력까지 착취했다.

     특히 일제는 진주길야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14살 안팎의 어린 6학년 여
    학생들을 정신대로 끌고가 희생물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중안초등학교에 보관된 당시의 학적부를 보면 수십명의 여학생들이 정신
    대에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진주길야국민학교의 학생들이 정신대의 희생물로, 근로봉사활동으로 번돈
    과 국방헌금으로 「吉野號」 전투기 한대를 헌납할 정도로 노동력을 착취당
    했다.

     해방후 1945년 9월24일 진주중안공립국민학교로 개명이 바뀌난 이후 같은
    해 12월24일 금성공립국민학교, 46년 9월15일 천전공립국민학교, 62년 3월2
    일 봉원국민학교, 70년 3월1일 봉곡국민학교, 81년 3월1일 촉석국민학교
    등 인근 5개교에 학급을 분리시켰다.
     6·25 전쟁이 발발했던 50년 8월 본관과 강당, 신관교사가 파괴되었으
    며, 11월17일 학교 운동장에서 지뢰가 폭발해 임시휴교되는 등 고난을 겪었
    지만 60여차례에 걸쳐 경남도·진주시 연구·시범학교로 지정, 운영하는
    등 경남교육의 중심학교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지난 2월 현재 까지 99회
    졸업생 2만5천여명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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