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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19) 진해

  • 기사입력 : 2006-09-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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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문화·역사 어우러진 '낭만의 도시'


    진해로 가는 길은 벚꽃이 만개하여 꽃비가 내리는 봄이면 아름다움과 낭만이 이어진다. 예전에는 해군 속의 진해라고 할 만큼 해군이 먼저 떠올랐다. 일제시대 왜군 진해방비대가 이전하면서 군항으로 자리 잡았다. 진해 시가지의 아름다움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안민고개나 진해의 진산인 장복산이나 불모산으로 가벼운 산행을 한다. 진해를 찾아가는 길은 꽃과 산이 있고. 아름다운 바다가 있으니 더없이 행복한 여행길이다.

    ▲장복산 공원·정암사

    장복산 공원 마진터널 방향으로 1.5㎞의 도로 양쪽에는 1만여 그루의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꽃이 피는 봄이면 누구나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벚나무 주변에는 소나무. 편백 등이 조화를 이룬 산책로가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시청방향으로 이어지는 고가도로를 따라가다 다리가 끝나는 경화초등학교 부근에서 우회전하면 도심 속에 작은 절집 정암사가 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는 한가로운 절집마당에는 연꽃과 연한 붉은 빛의 패랭이꽃. 대웅전 추녀에 달린 풍경소리 만이 길손을 반겨준다. 이곳에는 일제시대에 그려진 불화 2점이 있다. 정암사 아미타후불탱 및 초본은 아미타극락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아미타여래가 결가부좌하였고. 좌우로 유희좌를 취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앉아 있다. 정암사 신중탱 및 초본은 불교의 호법산신을 묘사한 불화로 우리나라 고유의 재래적인 신들을 수용하여 탱화의 변용을 꾀하여 우리민족의 관용적이고 역동적인 신앙관을 반영하고 있다.

    ▲웅천읍성·제포성지·웅천왜성

    시청을 지나 대발령 쉼터에서 수치해안을 바라보다 내려서니 작은 농촌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웅천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초입에 웅천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조선 세종 21년(1439)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은 1407년 일본과의 관계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항구를 열어 무역을 하던 곳인데. 일본인의 불법이주가 많아지자 이를 막고 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읍성을 쌓았다. 현재는 성의 동벽만이 동문터와 함께 500m쯤 남아 있으며. 동문터의 너비는 4m이다. 서벽과 남벽은 그 일부가 남아있고 북벽은 철거되었다. 성벽의 기초가 되는 부분에는 네모진 돌을 쌓았으며. 그 위에 사각형 또는 삼각형의 돌을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모양이 되게 쌓았다. 벽면은 땅과 수직으로 쌓았으며 큰 돌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웠다.

    인근에 조선시대 축조된 빙고지가 있다고 하여 찾아 나섰다. 빙고는 겨울에 자연적으로 얼었던 얼음을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냉장고 시설이다. 진해의 웅천 빙고지는 산능선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길게 마련되어 있다는 자료를 가지고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정표가 있었으나 철거했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바다 방향으로 제포성지를 찾아 나섰다. 제포성지는 성종 16년(1485)에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성터는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도록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자연석으로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문 밖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작은 성이 있으며. 성벽 주변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못을 파서 돌렸다. 주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작은 이정표라도 없으면 찾기 어렵다.

    웅천왜성은 제포성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어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다. 정상부에 본성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김달진 문학관·성흥사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천동으로 들어서면 이내 김달진 문학관 이정표가 반겨준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생가 옆에 아담한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달진 시인은 1920년 계광학교를 마친 뒤. 서울과 향리에서 수학하다 출가하여.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였고. 1939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 『문예공론』에 <잡영수곡>을 발표하여 문단활동을 시작했고. 1940년 첫 시집 『청시』와 1948년 시선집 『올빼미의 노래』를 포함하여 시인이 남긴 방대한 저술은 1997년부터 『김달진 전집』열 아홉권에 담겨져 내려오고 있다.

    진해시 웅동 소사리 마을에 2005년 10월 개관한 문학관은 무욕과 탈속의 경지에 이르렀던 시인의 흉상이 있고. 시인의 일대기와 육필원고. 사용하던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어 시인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이 좋아했던 태산목. 비파목 아래서 열무 꽃을 바라보며 생가 마루에 걸터앉아 조재영 학예사(38)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시에는 문외한인 필자도 어느새 시인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문학관을 나와서 따가운 햇살에 벼가 무르익어가는 논길을 지나 굴암산 방향에서 성흥사 방향으로 들어서면 입구에서는 주민들이 자연발생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입장료는 받고 있었지만 절집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쓰레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절집 입구에 들어서니 문 앞에 피서객과 노출복장을 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성흥사는 신라 흥덕왕 8년(833)에 무염국사가 세운 절이다. 성흥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지만.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대단히 기울어져 팔작지붕의 느낌을 준다. 전반적인 건축의 양식은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이며 기록과는 달리 대웅전은 근래에 고쳐지면서 원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골포 굴강·안골왜성·청룡 대각석

    최근 신항이 들어서면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웅동을 지나 안골마을로 들어서니 바다에는 그림 같은 풍광이 이어진다. 바닷가에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초라한 안골포 굴강은 조선시대 배의 수리·보수, 군사 물자의 하역, 특수 목적 선박 등의 정박을 목적으로 세운 군사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다. 안골왜성은 안골동 마을 뒤쪽 동망산 정상 위에 있다. 성의 둘레는 594m이며.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이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 쪽으로는 일망무제의 신항공사가 한창이다.

    안골포를 나와 부산방향으로 접어들어 청룡대를 찾으니 이정표는 물론이고 아는 사람마저 찾기 어렵다. 마을 이름을 물어 찾아간 청룡대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세상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가기 전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 전하고 있다. 바위에 ‘청룡대치원서’라는 한자를 새겨 놓았다. 당시에는 이곳에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중완구·이승만대통령 별장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859호 중완구는 군항제 기간에만 일반인의 관람이 자유롭다. 고 이승만대통령 별장 및 정자도 해군작전사령부 내에 있어 일반인이 들어가려면 한달전 쯤 출입신청을 하여야 한다. 필자는 운이 좋아 두번쯤 만나기 어려운 문화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마산제일고등학교 학생부장·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맛집

    △수어지: 석동173-12. ☏055-542-1930. 대게와 킹크랩 전문점. 산지에서 직송한 최상급의 재료를 사용하여 신선한 요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수목원: 두동 1194-3. ☏055-551-1500. 한우갈비 전문점.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여 외국인도 찬사를 보낸다. 자연과 어우러진 산책로가 있어서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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