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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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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52) 남강(25·끝)- 의령군 의령읍~함안군 대산면

먼길 내려와 남강 만난 낙동강은 다시 유유히 흐르고…

  • 기사입력 : 2010-04-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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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강과 낙동강의 만남

    백련사

    봄을 시샘하는 폭설이 대지를 덮어도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우리 땅 가는 곳마다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남쪽 끝자락 제주도에도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수학여행 길을 나선 학생들의 추억을 위해 기꺼이 봄을 선물하였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는 우도 올레길에도 붉은 동백과 목련은 뚝뚝 떨어져 지고 있었고 돌 담장 사이로 보이는 밭 자락에도 노란 유채꽃이 색칠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길 하동 섬진강 따라 가는 길에도 강에서 봄 안개가 넓게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도땅 구례에도 산수유가 한껏 노란 꽃으로 단장하고 봄을 열더니 이내 섬진강 자락 매화나무에도 흰색, 연분홍의 꽃들이 봄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 의령 지석묘군

    남강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한층 가벼웠다. 의령 지석묘군은 국도 20번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천국이다. 당시의 기록이 없었던 터라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기도 한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강화도를 비롯해 전라북도 고창과 전라남도 화순에 널리 분포되어 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창이나 화순지역에 있는 고인돌은 낮은 산등성이에 씨앗을 뿌려 놓은 듯 흩어져 있어 꼭 지배층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 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 식으로 구분된다.

    약 20년 전 문화유산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전국에 있는 고인돌을 가족들과 자주 찾아 다녔다. 지금은 장성한 아들이 어릴 적 내 묘지를 고인돌로 해주겠다고 했다. 아들은 나의 전자메일 아이디(ID)도 한국의 고인돌(dolmenkr)이라고 만들어 주었다. 선조들은 무덤도 문화유산으로 만드는데 지금의 일부 사람들은 명당이라는 명분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을 만들며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

    의령 고인돌은 상정리 앞 들판에 7기가 흩어져 있고 수성리에 4기, 신포리에는 입석이 8기가 있다. 신포리 마을 입석은 에워싸듯 둘러서 있다. 입석은 바위를 길게 다듬어 세워놓은 것으로 선돌이라고도 한다.

    선사시대에는 고인돌 주변에 세워 묘의 영역을 표시하기도 하였고, 마을 입구에 세워 귀신을 막거나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농경사회의 풍요로운 수확과 장수 그리고 다산을 비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남강으로 흐르는 덕암저수지

    ◇ 백련사.보리사지

    수성리 고인돌에서 개승리 방향으로 호젓한 길을 가면 물이 가득한 서암저수지를 만난다. 마을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자굴산 중턱에 백련사가 있다. 예전에는 자굴산 등산을 하려면 백련암에서 잠시 쉬어 가는 쉼터가 되었다. 자굴산과 한우산 사이로 도로가 개통되어 산을 쉽게 오를 수 있게 되면서 절집은 조용해졌다.

    백련사는 1317년 고려 충숙왕 4년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의 건물은 없고 근래에 건축한 것으로 보이는 대웅전에 목조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은 방형 얼굴에다 허리에서 무릎 아래를 덮은 긴 치마 모양의 옷이 부채꼴 표현을 하고 있다.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내려있는 작은 요사채가 1채 있고 흙벽에는 짐을 날랐던 지게가 기대어 있었다.

    백련사를 나와 보리사지를 찾아 경남학생교육원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철조망으로 가려진 좁은 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보리사지가 있다. 현재 절터는 대부분 파괴되고 사찰 건물의 축대로 사용되었던 장대형의 석축과 건물의 기둥 받침돌로 사용되었던 초석이 일부 있을 뿐이다. 그나마 무슨 단체에서 수련을 하는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건물 뒤쪽에 있는 석축의 규모는 높이 2m 내외이고 길이는 길지 않은데 군데군데 무너진 흔적들이 있다. 절집이 있던 자리는 잡초가 우거지거나 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절의 유래나 규모는 기록이 없고 막연히 신라 고찰로 전해져 오고만 있다. 남아 있는 석축 규모나, 출토되어 동아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불여래입상 등으로 볼 때 절의 규모는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안내판이 없었다면 절터라는 것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수도사 5층 석탑

    합강정

    ◇ 수도사.합강정

    의령 읍내로 들어서면 느티나무 부근에 이름도 생소한 천연기념물 제196호 ‘의령서동리함안층빗방울자국’이 있다. 바위 면에 새겨진 빗방울 자국(우흔·雨痕)은 도로 옆 2m 높이의 평평한 곳에 있으며, 겹쳐져 있었다. 빗방울 자국이 있는 이 지층은 약 1억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가뭄으로 한때 호수의 물이 줄어서 호수 바닥에 쌓였던 퇴적물이 노출되었고, 그 위에 떨어진 빗방울의 충격으로 자국이 생긴 것이다. 차츰 마모되어 가는 빗방울 자국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 시설이 필요하다.

    의령 읍내를 벗어나 국도 20번을 따라가면 천년고찰 수도사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난다. 수도사 가는 길목에 있는 덕암저수지에서 모인 물이 용덕천을 따라 내려오며 들판을 적시고 남강으로 흘러든다. 덕암저수지 끝자락에 닿으면 좁은 산길로 수도사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 자동차를 두고 걸어가면 아름다운 숲과 나무들이 반겨주는 올레길이다. 다람쥐들이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기도 한다. 수도사는 신덕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이 중심 전각이며, 그 뒤에 칠성각과 동서 양편에 요사채가 있다. 또 계단 위에는 높다랗게 누각을 올려 산신각이라 하였다.

    수도사는 662년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2년에 고승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그 뒤 송운대사 유정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절의 뒷산에 흡사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가 있어 사람들은 이 바위를 병풍바위라 하는데 당시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100여 명의 제자와 함께 수도를 하였다고 전하며 절의 이름을 수도사(修道寺)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수도사에는 석조아미타여래삼존상과 감로탱, 석탑 및 부도군, 칠성탱 등이 있다. 석조아미타여래삼존상의 우협시 지장보살상은 조선중기 17세기 이후 지방화 경향을 띠고 있다. 극락전 앞에 있는 5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이 보이나 현재 위치가 아닌 듯하다. 절집 아래 동쪽 산기슭에 모두 10기의 부도가 있다. 옛날에는 이 절의 규모가 제법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곡면으로 발길을 돌려 근래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 생가를 둘러보고 지방도로 1041호가 남강을 가르고 있는 송도교를 건넜다.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로 가는 좁은 길로 들어서니 합강정이 산기슭에 숨은 듯 있었다. 남강과 낙동강이 합해지는 곳에 있다고 하여 합강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정자에는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조임도(1585∼1664)의 문집인 ‘간송문집’과 ‘금라전언록’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 190매가 보관되어 있다. 먼 거리를 쉼없이 흘러와 남강과 만난 낙동강은 사람들의 이기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 고요하게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여행 TIP -맛집

    ◇대정가든(박종향)= 의령군 용덕면 신촌리 480-4 ☏ 055-572-0097. 오리고기 전문집. 불고기, 훈제. 수도사 가는 길목에 있으며 자매가 운영한다. 인심이 좋고 농산물을 손수 가꿔 제공한다.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 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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